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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Oct 02. 2023

100퍼센트의 꼰대


100퍼센트의 꼰대가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가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요즘엔 꼰대, 라는 말이 자 다들 욕할 준비 되셨나요? 정도로 쓰이는 모양이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쪽은 아니고, 말하자면 스스로가 자신의 답을 아주 강력히 신뢰한다는 부분이다.


나는 무언가 답이 필요한 상황을 마주하면 (당연한 얘기지만) 가장 괜찮은 답을 가져내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렇게 가져낸 나름의 답을 세상에 대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가, 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쉽지 않다.


물론 삼겹살엔 기름소금인가요 쌈장인가요? 처럼 개인적인 취향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문제에 대해선 저로서는 분명히 쌈장입니다, 정도로 당당히 외쳐낼 수 있다. 거기에는 정답이 있으니까. 나한테 맛있으면 이건 맛있다, 가 정답이고 나한테 예쁘면 이건 예쁘다, 가 정답이다. 나의 비밀스러운 실감 자체가 분명한 정답이 되는 것이다. 나의 답이 정답임을 뒷받침하고 남들을 끄덕이게 할 만한 이유, 예컨대 기름소금과 달리 쌈장의 이런저런 점이 삼겹살의 느끼함을 모조리 체포해 가기 때문입니다, 같은 거야 있으면 좋다. 하지만 그런 그럴 듯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고 해도 나의 답이 정답이라는 사실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쌈장인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그냥 쌈장이 좋아, 라거나 내맴, 이라고 대답해도 아무튼 그만인 것이다. 뭐 맛집 프로그램의 출연자라면 그런 식의 대답은 곤란하겠지만(맛집 프로그램이니까), 일단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세상에 외쳐야 할 답이 개인적인 호오처럼 정답이 있고 내가 정답을 명확히 알게 되는 종류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 나름의 옳고 그름이나 당위 그리고 가치 판단을 기반으로 한 의사 결정의 영역에 닿아 있는 경우엔,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 맞다 틀리다, 누군가 잘했다 잘못했다, 뭔가를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같이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영역에 위치한다면, 이 당당히 외치기, 의 난이도 또한 아득히 다른 차원이 되어버린다.


만약 내가 정의란 무엇인가, 류의 문제들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논쟁거리들, 예컨대 국민연금 이대로 괜찮은가, 라든가 사회에서 영영 매장시켜버려야 할 인간의 기준, 또는 안락사, 저출산, 반려동물, 노사갈등, 언론, 연애, 육아, 군대, 학교 등의 문제에 대해 답을 내고 세상에 외쳐야 할 상황에 처해버린다면.. 이거야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진다.


나의 직관은 역시 뭔가를 속삭여주겠지만, 이번엔 그 속삭임이 그대로 정답이 되어주진 않는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도대체가 세상에 정답이란 게 있긴 한 건지도 확실치 않다. 이렇게 개인적인 믿음과 판단이 개입된 문제, 그러니까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서 나름의 답을 가져내는 방법은, 결국 선택이다. 하나의 정답이 아닌 여러 개의 답이 존재할 수 있고, 각각의 답은 불가피하게도 각자의 허점을 수반한 불완전한 답일 것이며, 나의 답 또한 결코 완벽한 정답이자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이게 맞다 이게 최선이다, 라는 식으로 선택의 리스크를 감수한 채 나름의 최선을 결정해내는 것이다.


답이 필요한 상황을 맞닥뜨린 모두는 선택을 한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중립국이든, 아무튼 나름의 최선을. 하지만 선택을 한 모두가 꼰대가 되어낼 수는, 다시 말해 자기 나름의 답을 남에게까지 관철시키려 드는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업무상 필요하다거나 기르는 강아지가 붙잡혀 있다거나 하는 외부적인 요인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그런 일을 자발적으로 해내는 데엔 최선을 결정해내는 자신의 기준과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가, 그러니까 여러 개의 답안 중 자기가 선택한 나름의 답이 정말 최선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강한 확신, 을 가지는 방법이야 답의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들을 끄덕이게 할 만한 고품질의 근거를 마련해낸다든지, 아니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냥 잘 확신해버리는 타입의 인간이든지 뭐 다양할 텐데, 아무튼 진정한 꼰대가 되기 위해선 (원칙적으로) 자신의 답에 대한 강한 확신이 필수적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생각해 보면 (좋은 의미로)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과 꼰대는 별반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 내 생각에 전자와 후자를 가르는 키워드는 짜증,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상대방의 확신에 기반한 강력한 드라이브가 그 인간에 대한 나의 애정을 뛰어넘는 짜증을 유발한다면, 그 사람은 내게 있어 꼰대로 분류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은 관계된 수치들의 변화에 따라 주관이 뚜렷한 사람과 꼰대 사이를 시시각각으로 오가게 된다. 누군가에겐 스승으로 불리는 사람이 또 누군가에겐 꼰대로 불리는 상황은 아주 흔한 일이다.


예컨대, 내가 본가에 내려가면 아빠는 매번 식탁에 소주를 따라놓곤 아들아 바람직한 삶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내용의 강연을 여신다. 그 강연을 듣다 보면 흥 아빠는 맨날 자기 말만 맞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가.. 다 나 잘 되라고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에 고맙기도 했다가.. 나는 내가 믿는 옳고 그름에 대해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을까 싶어 아빠가 좀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뭐 이런 식으로 아빠의 정체성은 계속 달라져간다. 그런가 하면 똑같은 성경을 읽고서도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이 아저씨는 뭐 이렇게 하라는 거랑 하지 말라는 게 많아, 라며 별점 한 개와 함께 세상에 이런 꼰대가 없다고 한줄평을 남길 수도 있다. 또 개인적으로는 고등학생 시절 아프니까 청춘이다, 를 기숙사 친구들과 돌려보며 아주 감명 깊게 읽었는데, 어느 날 인터넷을 보니 그 책이 희대의 꼰대 도서로 낙인찍힌 채 세상의 조롱을 받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본질적으로 같은 특성을 가진 대상이 상황에 따라 꼰대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게 아닐까 싶다.


다시 돌아와, 나는 특별한 외부적 개입이 없이 자체적으로도 충분히 꼰대가 되어내는(혹은 그렇게 불릴 수도 있을)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들의 답에 동의할 수 있든 없든 그렇다. 단단한 비전을 갖고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리더, 매체에 출연해 열변을 토하는 시사 평론가나 토론 프로그램의 패널, 인류 역사의 수많은 사상가와 활동가, 댓글창의 검투사 등등. 요컨대, 나름의 답을 남들에게 관철시키려들 정도로 그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답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그것을 남에게까지 관철시키려 든다는 건, 그 답으로 하여금 관계자들의 지지나 논쟁에서의 승리나 내가 바라는 변화 등을 얻어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의 답을 남들의 공격에 노출시키는 일이고 그로 인한 각종 책임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전자의 달콤함도 물론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감당해야 할 것들의 기척을 좀 더 가까이 느낀다. 나는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최악을 상상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데다, 미움받는 상황이나 죄책감에 굉장히 취약한 성격이니까.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는(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 나름의 답을 그렇게까지 믿어내는 게 잘 안 된다.


이 정도면 거의 난공불락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나름의 답안이 시간과 각종 사건들에 의해 자주 함락되어버린다. 듣고 보니 내 생각보다 저쪽 말이 더 맞는 것 같아 조용히 답을 갈아치우는 경우도 많다. 나를 믿고 따라와준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겨준 적도 더러 있었다. 이런 풍파를 맞다 보면 나를 신뢰하고 내 답을 강력히 푸쉬해내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뭐 불가피한 경우엔 나름 강하게 밀어붙이기도 하지만, 그래놓고는 또 불안에 떨어댄다. 음.. 이거야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의 답을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작게 속삭이거나, 무책임과 폭넓은 비약이 허용되는 농담으로 먹음직스럽게 튀겨내거나, 그것을 꽤 확신하는 상황에서도 같아요, 등의 말로 확신의 뉘앙스나 책임을 조금이나마 지워내려 든다. 그러다 보니 같아요, 를 부착하는 게 습관이 돼버려 이젠 막 아무 데나 붙여댄다. 확실히, 라는 말과 같아요, 라는 말의 조합은 확실히 좀 이상한 것 같은데도.


이런 꼰대로 불릴 수도 있을 능력을 좋다 나쁘다, 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을 테니까. 뭐 세상 사람들이 죄다 나처럼 확신 없이 굴었다면 인류는 아직 청동기쯤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철도 좋긴 한데요.. 계속 청동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아니 그렇다고 제가 철 쪽을 막 반대하는 건 아니구요.. 뭐 딱히 계속 청동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아니긴 한데.. 이런 식으로 우물쭈물만 해대면서. 어떤 변화든 그것의 실현엔 자기의 답에 대한 신뢰가 가득한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내가 아 나도 나름의 답에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그래서 자칫 꼰대로 불릴 수도 있을) 사람이 되어내기 위해서 정진 또 정진해야지, 라고 다짐하는 건 아니다. 강력한 확신이 피어오를 때까지 고독한 대장장이마냥 그것을 제련해대는 건 (뭐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정말 귀찮은 일이니까. 난 그냥 좀 편해지고 싶다. 그래서 처음에 말했듯, 나의 소망은 오직 100퍼센트의 꼰대인 것이다.


이 100퍼센트의 꼰대란 그저 그런 꼰대와는 격을 달리한다. 일반적인 꼰대는 정답이 없는 문제, 라는 전제를 수용하고, 여러 답 중 최선을 판별해내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 를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즉, 나름의 답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남겨둬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의심이 자칫 무럭무럭 자라나 확신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 사이로 혹시 나의 답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며들어, 극심한 혼란과 스트레스에 휩쌓여버릴 가능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100퍼센트의 꼰대는 다르다. 그는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 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의 세상엔 정답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정답이란 곧 본인이 가지고 있는 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는 정답으로서 살아가며 그런 삶의 방식을 통해 평범한 꼰대가 겪을 수도 있을 각종 번뇌의 가능성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번뇌가 유발하는 고통에서의 해방.. 100퍼센트의 꼰대란 행복을 거머쥐고 있는 자가 아닐까? 어떤 반론도 그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 반론 또한 틀린 답일 뿐이니까. 그는 정답이라는 두터운 장갑을 두른 장갑차마냥 행복을 향해 약진 또 약진한다.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문제에 대해, (기르는 강아지가 붙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오직 자신의 답만이 정답이며 나머지는 모조리 다 틀려먹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목격하면, 나는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본인과 다른(틀린) 답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 빨갛거나 파랗거나 해삼멍게말미잘일 거라고 너무도 단호히 진단내리기까지 한다면, 이거야 진심으로 감탄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그런 사람이 좋다 나쁘다, 라고 얘기할 순 없을 것이다. 역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을 테니까. 다만, 그런 식으로라면 살아가는 데 있어 정신적으로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나는 아무튼 좀 편해지고 싶기 때문에.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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