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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증상 답사기

by 최우주

2007년

어느 날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때 늘 그렇듯이 휴대폰 폴더 화면을 열었다. 원래는 시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지만 웬일인지 한참 동안 화면을 응시해야 눈에 글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밤에 잘 다니던 계단의 층계가 서서히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계단 경계가 잘 보이지 않게 된 후 자연스럽게 난간을 잡는 버릇이 생겼다. 발을 내밀어 발밑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 계단의 끝을 감지했다. 오르는 계단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내려가는 계단은 경계가 보이지 않을 때 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계단에 경계선을 표시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순히 미끄러움을 방지하는 용도로 생각했었지만, 저시력자들에게는 계단을 분명하게 표시하는 장치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중에 계단의 경계표시가 반드시 모든 계단마다 있을 필요는 없으며, 시작과 끝부분만 있어도 구분이 쉽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에스컬레이터의 경우에도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경계표시는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디자인적 감각을 살리겠다고 계단 중간에 선을 그어놓은 곳을 발견하였는데, 저시력자들에게는 넘어지기 딱 좋은 시설물이었다.

야맹증이 처음 발현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불빛이 조금만 약해도 사물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특히 어두운 운동장이나 가로등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낙상의 위험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어느 날은 잘 보이던 연석이 하루 만에 보이지 않는 경험도 하였다. 이때부터 눈의 컨디션에 따라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가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컨디션이 극적으로 좋은 날은 반드시 다음 날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컨디션을 위해 날짜를 맞추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2008년

야맹증이 비타민 A 결핍으로 인해 생긴다는 것이 떠올랐다. A를 옆으로 돌리면 마치 안구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근을 많이 섭취하면 A를 보충할 수 있다고 들었다. 따라서 야맹증이라는 증상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결핍으로도 생길 수 있다는 막연한 인식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8년 4월,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특례 복무를 하던 중 4주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평소에 도시에서만 살다가 불빛이 적은 농촌에 가게 되니 확실히 어둡게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함께 입소한 동료들은 어둠 속에서도 별다른 불편함이 없는 것 같았다.

야간 사격훈련을 위해 어두운 산길을 갔을 때 비로소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멀리 있는 과녁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훈련병들이 표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야맹증이 단순한 증상이 아님을 직감하고 병원을 방문하였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유전성 희귀 난치질환 판정을 받은 후 심리적인 부담감 때문인지 천천히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문증.png 비문증과 광시증


비문증은 마치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잠시 동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눈앞에 떠다녔고, 나중에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갈색으로 보이지 않는 점이 생겼다. 이 점들은 없어지기도 하면서 다시 생기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지속적으로 눈을 괴롭혔다. 안압이 상승하면서 눈의 피로감과 충혈이 자주 생겼다.

광시증은 눈에 갑자기 섬광 같은 것이 보이는 증상이다. 그 모양이 올챙이 같기도 하고 원형으로 생기기도 하였다. 올챙이 같다고 한 이유는 이 섬광이 물을 헤엄치듯 부드럽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의 중앙에서 시작해 가장자리로 이동하기도 하고, 가장자리에서 시작해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어느 때는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광시증은 불현듯 나타나 사라진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2009년–2010년

이제 야맹증은 더욱 심해져서 야간 활동에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즉, 가로등이 있더라도 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이때부터 약속을 잡더라도 야외가 아닌 지하철과 연결된 대형 쇼핑몰을 선호하게 되었다. 어두운 길을 걸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득 북유럽 국가에서 발생한다는 백야 현상을 동경하기도 했다. ‘해가 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간 활동 제약으로 인간관계가 정리되었다. 원래 개신교인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지만, 어두운 술집을 가거나 노래방을 이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어 해가 지기 전에 귀가를 서둘렀다. 그래서 겨울보다는 여름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의 개념을 정확히 깨달았다. 추분이 지나 퇴근 시간이 어두워진다는 생각에 긴장을 했고, 춘분이 지나 해가 길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눈에 대한 걱정과 시신경의 부담 때문인지 종종 두통을 겪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게보린 같은 진통제를 드셨고, 나 역시 진통제를 구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머리가 아프면 시력에도 영향을 주어 힘든 상황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진통제를 찾게 된다. 하지만 반드시 두통이 시력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위통약도 함께 복용하고 계셨고, 동생 역시 나와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았지만 소화불량과 두통이 더 심했다. 비교적 나는 두통을 참아보려고 노력했고, 적절한 수면과 마인드 컨트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했다.


2012년–2015년

본격적으로 사업과 학업을 병행하게 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직면했다. 특히 개발자 일을 하게 되면서 컴퓨터 화면을 오래 보게 되었고, 시간에 쫓기듯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눈에도 무리가 생겼다. 특히 밤을 새우고 나면 비문증이 더욱 심해져 눈 전체를 뒤덮기도 했다.

이때부터 회색 계열 색상 구분이 어려워졌다. 하얀 바탕에 회색 글씨가 보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검은 글씨와 두꺼운 폰트를 선호하게 되었다. 망막에 문제가 생기면 빛을 조절하는 간상세포에 이상이 생긴다. 카메라에 비유하자면 조리개가 고장 나 빛을 받아들이고 상을 맺히게 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낮에는 너무 많은 빛을 받아 세상이 하얗게 보이고, 밤에는 빛을 충분히 모으지 못해 어둡게 보인다.

하얀 종이에 적힌 글씨는 너무 많은 빛을 반사하여 오히려 글자 해독을 방해했다. 이때부터 종이를 멀리하고 디지털 문서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문서는 색상 반전으로 검은 바탕에 흰 글씨를 만들어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스마트폰이 활성화되면서 종이는 대부분 사진으로 찍어 원하는 형태로 변환해 읽었다.

특히 은행 업무가 쉽지 않았다. 날인이나 서명 위치를 알 수 없어 도움을 받아야 했다. 2015년 봄 처음으로 은행원에게 서명 위치를 물어본 기억이 난다. 2014년까지만 해도 형광펜 표시가 보였지만, 이후로는 보이지 않았다.


2016년–2018년

어느 날부터 눈에 노란빛이 감도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 더 밝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상이 초록빛으로 물들기도 했다. 노랗게 물들면 밝게 느껴 좋았지만, 푸르게 물들면 약간 어둡게 느껴졌다. 방의 전등은 항상 일정한 조도를 유지했지만, 내 컨디션에 따라 방이 어둡게 느껴지기도 하고 밝게 느껴지기도 했다.

색각이상.png 색각이상으로 초록빛으로 물든 모습


어느 날 아내에게 평소 입던 남색 줄무늬 옷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초록색 줄무늬밖에 없다고 말했다. 옷장에서 꺼내어 “이 남색 옷을 말한 거야.”라고 하자, 아내는 “그건 초록색이야.”라고 정정해 주었다. 수년간 남색으로 알고 있던 옷이 초록색이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신기한 것은 머릿속으로 초록색이라고 인식한 뒤부터 실제로도 초록색으로만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통해 색을 구별하는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주관적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망막 손상으로 인해 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경험을 통해 조금씩 다른 색을 인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색각이상은 심화되었다. 어떤 날은 세상이 빨갛게 물들기도 했고, 녹색과 빨간색이 반반으로 섞여 보인 날도 있었다. 하루는 파랗게 물든 세상을 살다가 저녁이 되면 전혀 다른 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2019년–2020년

색각이상의 심각성을 깨닫고 10년 만에 병원을 재방문하였다. 그동안 병원을 멀리한 이유는 심리적 요인이 컸다. 본래 6개월 또는 1년에 한 번씩 추적 관찰을 하지만, 심리적 부담으로 병원을 찾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았다. 이미 치료가 어려운 난치성 질환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로소 2019년 4월부터 시각장애 5급 판정을 받고 현실을 인정했다. 문제는 중심시력의 소멸이었다. 실제로는 글자도 읽고 그림도 볼 수 있었지만, 이미 중심시력을 대부분 소실한 상태였다. 의사에게 “지금도 많은 것을 보고 있다”라고 말했지만, 망막 사진으로는 이미 실명 환자와 다름없다고 했다. 중심시력 저하는 가까운 사물은 어느 정도 보이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물체를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사물을 잘 보기 위해 눈을 열심히 굴려 초점을 맞춰야 했다. 즉, 한 번에 사물을 전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본 후 머릿속에서 합쳐 파악했다. 그래서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것이 어려웠다.


2021년–2022년

왜곡.png 좌우 시야가 왜곡되어 수물이 휘어져 보임


2021년 가을부터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어느 날 스마트폰을 보는데 글자가 약간 휘어져 보였다. 캡처해서 확대해 보면 올바른 글씨였지만 작게 보면 뒤틀려 보였다. 같은 글씨를 90도로 꺾어서 볼 때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이때 스마트폰이나 앱의 문제가 아닌, 눈의 문제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는 황반변성의 증상이었다. 황반변성은 실명질환으로, 중심부의 변성으로 인해 황반에도 영향을 준다. 글씨뿐 아니라 세상이 볼록하거나 오목하게 보였다. 볼록렌즈처럼 중앙이 확대되어 글자가 뒤틀려 보였다.

2022년 봄부터는 시력저하가 본격화되었다. 스마트폰의 글씨가 읽히지 않았다. 안경을 벗으면 글씨가 보였지만 몇 달 후에는 화면을 확대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었다. 따라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확대/축소 기능을 필수적으로 사용했다. 시력 저하가 심해지자 왜곡 현상은 점차 익숙해졌고, 가끔 인지될 때마다 형태가 다르게 보였다.

앞서 말한 증상들은 컨디션에 따라 번갈아가며 좋음과 나쁨을 반복했다.


2023년–2025년

반점.png 황반 이상으로 반점 출현


황반변성은 기본적으로 반점이 보이는 현상을 동반한다. 반점은 2024년 가을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글자의 일부(‘가’ → ‘기’)로 인식되어 오타를 잘 발견하지 못하거나 사람 이름을 틀리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반점이 4개 정도 항상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검은 바탕의 화면을 볼 때 두드러졌다. 흰 글씨 위에 마치 불에 탄 자국처럼 글씨가 지워져 보였다.

이 반점은 눈을 감아도 보였다. 즉, 세상에서 가장 심도가 깊은 ‘매트 블랙’ 색감처럼 느껴졌다. 이 점들은 군집을 이루기도 하고, 깊게 주시하면 사라지기도 했다. 아주 가끔 밝은 느낌의 반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반점과 시력저하로 인해 사람의 얼굴을 봐도 눈이 지워져 보이기도 했다. 즉, 사람의 얼굴에서 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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