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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

by 최우주

내가 초등학교 때 부모님과 이사를 갔다. 아마도 이 지역에 큰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식구들이 살고 있었기에 결정이 쉬웠을 것이다.

사실 이곳은 어떻게 보면 기회의 땅이었다. 1990년대 경제성장의 끝을 바라보며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졌다.

부모님은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분식집을 개업하여 두 형제를 키우셨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의 여파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우리 가족이 살던 전셋집도 빼앗기고 말았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은 내가 한창 공부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일어났다.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성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집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그 이유는 그 친구 집에 최신형 컴퓨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을 하였고, 내가 게임을 할 차례면 잘하지 못해 친구들에게 매번 핀잔을 듣기도 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동체시력에 조금 문제가 있어 사물을 잘 구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들이 하는 게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자랑스럽게 본인이 만든 웹사이트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순간 “나도 사이트 개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정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 당시 PC 보급을 위해 출시된 ‘우체국 국민 PC’로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나와 동생은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것을 손에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와 웹사이트 만드는 법을 검색하였다.

따로 학원을 갈 수 없었고 오로지 독학으로 해결해야 했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예를 들어, 코드 한 줄이면 처리될 문제를 며칠 동안 고민하며 찾았고,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다.

약 1년의 세월을 연습한 끝에 비교적 그럴싸한 사이트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후배에게서 “웹사이트 경진대회에 입상하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이미 성적은 중위권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승부를 볼 수 있는 방법은 경진대회 입상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스크가 큰 결정이었기 때문에 입상을 위한 몇 가지 전략이 필요했다.

우선 주제를 공익적이면서도 의미 있게 구성할 것, 두 번째는 방 안에서 만든 콘텐츠가 아닌 직접 취재를 통한 구성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마침 역사 수업을 통해 들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 선생님은 나의 생각을 지지해 주셔서 광주로 가서 콘텐츠를 취재해 볼 것을 조언하셨다.

2002년 5월 17일,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선생님의 조언대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기념식과 문화행사 등을 취재했다.

현재 고등학생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 콘텐츠를 만들었고,

이를 웹사이트에 자연스럽게 녹여 초반에 세웠던 전략을 비슷하게나마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2002년 10월, 나는 웹사이트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수능일이 가까워졌고 수시모집도 이미 끝난 상황에서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머릿속에 기획한 아이디어가 인정받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하였다.

좋은 환경과 장비, 든든한 지원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주변 상황을 보고 좌절하기보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인터넷과 관련된 일을 하였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중퇴하고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부터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을 흔쾌히 채용해 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도 급여를 최대한 낮추더라도 실무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월급 80만 원을 받고 가까스로 작은 웹 에이전시에 취업했다.

야맹증이 발현되기 전이어서 장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오로지 “어떻게 커리어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밤낮없이 일을 거듭하면서 꿈에 그리던 대기업에 취업하기도 했고,

병역특례를 받아 군 복무를 대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학에 다시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 나갔다.


“이 시점부터 유전 질환의 스위치가 켜졌다.”


할머니

할머니는 고씨 성을 가졌다. 그리고 전라남도 신안군의 하의도라는 섬에서 사셨다.

그 섬은 목포에서도 2시간 반이나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예전에 내가 할머니 댁에 방문했을 때는 6시간이나 걸렸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이 너무 강해 어두운 선실 안에서 구토를 수없이 했던 기억이 있다.

선착장에 배를 바로 댈 수 없어서 통통배가 마중 나왔고,

문제는 그 섬에 들어가서도 차로 30분이나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풍경은 환상적인 곳이었다.

마당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넓은 갯벌과 수평선이 보였고,

밀물이 들어오면 수영을 하고 갯벌이 드러나면 갯지렁이나 조개를 캐고 망둥어 낚시를 즐겼다.

이 섬의 주민들은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거나 근처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었다.

우리 할머니도 농사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총 7남매를 두었고, 우리 아버지는 차남이었다.

옛날 어르신들의 상황이 다 비슷했겠지만,

없는 살림에도 많은 자녀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았다.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수도권에 정착하였고,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역귀성을 하셨다.

먼 거리 탓에 7남매가 함께 모이기는 힘들어서인지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영등포역까지 오셨다.

나와 아버지는 700번 좌석버스를 타고 마중을 나갔다.

항상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오시는 모습이 사이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할아버지가 안내보행(시각장애인의 보행을 돕는 것) 중이셨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는 버스를 탈 때도 항상 발을 허우적거리며 타셨고,

어릴 때는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할머니는 비교적 오랫동안 시력을 유지하셨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생 때도 리어카를 끌고 밭에 나가셨는데 시각장애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가실 때쯤에는 귀도 어두워지셔서 어지럼증을 많이 느끼셨고,

눈과 귀 외에는 특별한 이상 없이 세상과 작별하셨다.

할머니는 “몹쓸 것을 물려준 것 같아 미안하다”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3년 전, 자녀들을 위해 유전자 검사를 받으시러 서울대병원에 방문하셨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거동이 불편함에도 피를 뽑고 눈 검사를 하셨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긴 머리를 하고, 동네 사람들이 봐도 조금 인상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분식집에서 어머니가 조리한 음식을 들고 배달을 하셨다.

그 당시 40대로 추정되는 아버지의 눈 상태는 지금의 나보다 더 괜찮았던 것 같다.

“아빠는 밤눈이 어두워.”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지만, 밤에 아버지를 배웅하러 나간 기억이 없기에

야맹증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엄청 두꺼운 안경을 착용하셨다.

자주 안경을 벗어놓으셨는데, 나 또한 가까운 글씨를 보기 위해 자주 그런 행동을 한다.

어릴 적 나는 그 안경을 쓰면 매우 어지러움을 느꼈다.

눈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유전 질환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글씨를 쓰실 때 ‘붓펜’을 자주 이용하셨다.

마치 붓글씨처럼 글자가 매우 두껍게 써지는 펜이었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붓글씨가 멋있어서 그 펜을 애용하신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나는 글자가 두꺼워야 식별이 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에서 글자를 키우는 것보다 볼드체를 적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내가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직장을 다녔다면 사무직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한창 일을 할 시기에 컴퓨터가 보급되었고, 꿈을 펼칠 시기에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시기에는 AI가 중심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질병의 원인도 진단하기 어려웠으며,

부족한 시력에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찾아 두 형제를 키우셨다.

오히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헌신과 노력으로

지금의 우리가 문명을 누리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알고도 나와 결혼해 주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을 낳아주었다.

내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큰 이유는 우리 가족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대학원 MBA 과정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 학교는 1년에 한 번, 약 20명의 학생들과 2주 정도 미주 지역을 연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 선발되었고,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하는 버스 옆자리에 앉았다.


영화처럼 6개월 뒤 결혼을 약속하고, 1년 뒤 결혼했다.


아내는 내가 계단을 내려갈 때 계단의 숫자를 세어주었다.


“3, 2, 1.”


계단 표시줄이 없는 경우 그 숫자에 맞춰 넘어지지 않고 순조롭게 내려갈 수 있었다.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역까지 마중을 나왔고,

밤길을 안내보행으로 항상 함께했다.

어느 날부터 글을 쓸 때 많은 오타가 발생하자 아내가 교정해 주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아내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오고 있다.

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에 가까웠다.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위치가 켜진 이후 그 성격은 타의에 의해 포기하게 되었다.

내가 부족해질수록 그 간격은 아내로 인해 채워졌다.


그리고 이 경험은 확장되어 세상의 많은 곳에서 나에 의해 발견되었다.

상황을 개선해 보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결핍을 만나고 그것이 채워짐으로 인해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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