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과 뽑기
일주일이란 것은 절대로 빠르게 가지 않았다. 아무리 학교를 열심히 다녀도 고작 수요일 저녁이었고,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시간은 우리 동네 언덕 위에 있는 대머리산을 힘겹게 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윽고 맞이한 토요일, 이 날은 학교에 잠깐만 앉아 있다가 오면 바로 집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 주에 방학식이래.”
“방학을 하는데 뭘 한다고?”
7월 16일, 방학식 하는 날 나는 지각을 하고 말았다. 베르네천 옆에서 뽑기 구경을 하다가 늦어버린 것이다. 아저씨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작은 국자에 담긴 연한 갈색 뽑기 반죽을 휘젓고 있었다. 그 색깔을 어디서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 엄마가 자주 마시던 맥심 커피 색깔이었다. 내가 자주 먹던 아이스크림인 ‘돼지바’에 엉겨 붙은 알갱이처럼 생긴 커피 가루를 녹이면 검게 변했지만, 흰색 프리마를 2~3숟가락 넣으면 꼭 뽑기 색깔처럼 되었다. 아저씨는 그 뽑기 반죽에 하얀 가루를 살짝 섞어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내 반죽을 바닥에 내리치고, 호떡을 만들 때 보았던 동그랗고 납작한 기구로 그 반죽을 눌러 피자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주문한 애들에게 물었다.
“너 무슨 모양이라고 했지?”
“별 모양이요!”
그러면 반죽이 굳기 전, 별 모양 철사를 반죽 위에 찍어주었다.
“아저씨 이거 별 모양대로 만들면 하나 더 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애들은 작은 바늘을 가지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별 모양을 도려내려고 노력했다. 어떤 친구는 과감하게 손으로 힘을 주어 모양을 만들려고 했다. 옆에서 그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어떤 친구는 빵 혹은 만두를 부탁했다. 반죽 자체를 납작하게 만들지 않고 그대로 내어 주면 ‘빵’이 되었고, 납작한 반죽이 굳기 전 그 안에 설탕을 넣고 반으로 접으면 만두가 되었다. 물론 이 작품들은 모양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를 더 얻을 기회는 없었고, 그냥 뽑기의 달달한 맛을 선호하는 애들의 취향이었다.
아저씨의 손놀림은 아침에 TV에서 보았던 만들기 선생님의 손놀림과 비슷했다. 나는 원체 만들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정교하게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마법처럼 신기해 보였다. 가열되는 불꽃, 그 안에서 녹아 커피 색깔처럼 변하는 뽑기 반죽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 등굣길에 이런 걸 파는 아저씨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하굣길이면 몰라도, 애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자리 잡고 유혹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굣길이 더 활발했다. 병아리를 파는 할머니, 불량식품을 파는 아저씨 등 집에 빨리 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비디오
국민학교 1학년은 방학 숙제가 많지 않았다. 그림일기 쓰기, 체험 활동하기, 독후감 쓰기 등. 일기를 제외하고 나서 며칠 만에 다 해치워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과는 다르게 방학식이 끝난 후 숙제를 바로 시작하지 않고 비디오를 빌려 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보다가 마저 보지 못한 후레시맨을 다시 봐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방학했다고 이야기한 후 용돈을 타냈다. 그리고 곧장 청룡비디오로 가서 후레시맨을 연달아 빌렸다. 비디오를 빌릴 때 가장 실망스러운 순간은, 보고 싶은 프로 테이프를 뽑았을 때 비어 있는 경우였다. 물론 거꾸로 뒤집어 표시해두기도 하지만, 인기가 많은 프로일수록 미처 표시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애들이 보는 프로는 주로 낮은 칸에 있었기 때문에 어른들은 애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까만 비닐봉지에 비디오를 넣어 와서 동생과 시청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 번만 보고 돌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소한 2~3번을 보고 돌려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떤 것은 테이프가 늘어나서인지 흰색 지렁이가 수없이 나오는 구간도 있었다. 청룡비디오 아저씨는 그게 테이프 잘못이라기보다는 비디오 기기 헤드에 먼지가 많이 껴서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5,000원이나 하는 헤드 클리너를 우리 가족에게 팔았다.
나는 그 비디오 클리너 상자를 열고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같이 나란히 들어 있는 물약을 꺼내 비디오테이프 측면 움푹 파인 곳에 그 약을 넣었다. 물론 약을 넣다가 줄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테이프를 비디오기에 넣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니, 빨리 감기와 빨리 되감기를 반복적으로 해줘야 헤드가 깨끗해진다고 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흰 지렁이가 나오는 현상이 줄어들긴 했다.
한 번은 너무 끔찍하게도 비디오 안에 바퀴벌레가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면, 비디오의 시간 표시 쪽에 누가 봐도 확실한 바퀴벌레의 형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입장에서 비디오를 조작할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살아서 기어 다니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어느 날 그 자리에 멈췄고, 며칠 뒤 학교를 다녀오니 바퀴벌레가 사라져 있었다.
그 사건 이후, 헤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 먼지가 아닌 바퀴벌레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아는 사촌, 친구 집을 가도 바퀴벌레는 많았기 때문에 비디오기를 파고들어 가서 충분히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름휴가의 시작
그렇게 비디오만 보다가 결국 7월 말이 되었다. 아직 방학 숙제는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엄마는 우리도 휴가를 간다고 이야기했다.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외할머니네로 갈까?”
솔직히 말해 외할머니네는 너무 많이 다녀왔다. 물론 세상에서 엄마, 아빠 다음으로 나를 예뻐해 주는 사람은 외할머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 살 때도 추석, 설날, 생신 등 무슨 일만 생기면 정읍에 있는 외할머니네로 향했다.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3시간 정도 걸렸다. 고속버스에는 ‘중앙고속’이라고 쓰여 있었고, 흰색 바탕에 빨간, 파란 줄무늬가 그려져 있고 사자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다른 고속버스보다 중앙고속이 제일 멋있다고 생각했다. 유리창에 ‘정읍’이라고 새겨진 것도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버스는 정읍에 도착하면 구멍이 동그랗게 뻥뻥 뚫린 다리를 지나갔다. 그 다리를 보면 이제 할머니네에 다 왔다고 생각했다. 터미널에 내리면 할머니 댁까지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할머니네는 놀랍게도 슈퍼를 운영하고 있었다. 각종 과자와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파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할머니는 당연히 우리가 과자를 먹는 것에 대해 너그러웠다. 솔직히 과자만 맛있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해주는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아빠는 들깨국이 항상 맛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향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것보다는 쑥으로 빚은 초록색 떡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 집에 갈 때면 용돈과 함께 과자도 많이 챙겨주셨다.
“니네들 가면서 먹을 것 점빵에서 다 챙겨 와!”
라고 말씀하시면, 동생과 나는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않고 과자를 골랐다. 그렇게 모자라게 들 정도로 양손 가득 들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러 갔다. 몇 번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버스 타는 곳까지 배웅해 주신 적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매우 늦은 밤 전철 혹은 택시를 타고 봉천동으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아빠는 곰분식 셔터를 내리고 종이에 쓴 휴가 안내문을 붙였다.
‘여름 휴가 : 7월 30일 ~ 8월 3일’
그리고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진짜 외할머니 댁에 안 가고 바닷가라도 갈 생각인지, 부천으로 이사 온 후 첫 번째 여름휴가는 어디일지 궁금증이 쌓여 갔다.
그러자 길을 걸어가던 우리 가족에게 세일문방구 아줌마가 소리쳤다.
“곰분식! 니네 어디 가니?”
“우리 휴가 가요!”
“그래서 어디로?”
“글쎄요… 그냥 하의도나 갈까 해요.”
하의도는 우리 친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는 곳이었다. 거기는 목포에서도 배로 5시간이나 가야 하는 어마어마하게 먼 곳이었다. 솔직히 강원도 같은 이름난 휴양지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하의도’라는 대답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먼 데를 애들 데리고?”
세일문방구 아줌마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오늘 밤 우리 집 식구들이랑 전기집 식구들이랑, 또 거기… 식구들이랑 강원도에 가려는데…”
같이 강원도로 휴가를 가자고 하는 말이었다. 이미 엄마 아빠는 짐을 다 들고 이동하는 중이어서 거절할 줄 알았는데 곧바로 승낙했다. 아마 두 분도 정읍이든, 하의도든 가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사실 서울 살 때는 이렇게까지 친하게 지내는 이웃도 없었고, 엄마나 아빠도 직장에 다녔으니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끼리 야유회나 휴가를 같이 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갑자기 우리 가족은 강원도 원통이라는 곳으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