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통
곰분식 가족은 중간에 휴가를 가던 중 다른 가족에게 설득되어 갑자기 휴가지를 변경하게 되었다. 아침에 떠나고자 했지만, 계획이 변경된 탓에 저녁에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함께한 가족은 네 가족이고 인원은 15명쯤 되었다. 곰분식 가족은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가족의 봉고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봉고차는 부천을 빠져나와 서울을 지나고 강원도로 향하였다. 굽이굽이 뱀처럼 굽어진 산길을 지나 표지판이 하나 보였는데 ‘인제’, ‘원통’이라고 쓰여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원통이라고 했다. 딱히 숙소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한적한 강가에 차를 세우고 짐을 내렸다. 그리고 어른들은 강가에 큰 돌들을 운반하여 평평한 곳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4개의 텐트를 쳤다. 아이스박스에는 얼음들 사이로 병 음료수, 맥주, 소주 등이 가득했다. 그리고 함께 가져온 수박 3통은 분홍색 노끈과 함께 강에 풀어놓았다. 수박은 강의 흐름에 따라 둥실둥실 움직였고 떠내려가지 않도록 노끈을 무거운 돌에 단단히 고정하였다.
아이들은 텐트를 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놀이를 하기 위해 강가에 뛰어들었다. 강은 깊지 않았지만 맞은편 낮은 산으로 막힌 부분은 꽤 깊이가 있어 보였다. 텐트를 친 곳은 모래와 자갈이 많았고 낮은 산으로 갈수록 깊은 구조였다. 엄마는 절대로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물놀이를 하라고 당부하였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물은 차가웠다. 예전에 엄마의 고향인 정읍의 내장산에 간 일이 있었다. 그곳에도 이렇게 넓지 않지만 계곡이 있었고, 발만 담가도 온몸에 전기가 오를 정도로 차가웠었다.
함께 챙겨온 튜브를 가지고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물 안에서는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비쳤다. 그 물고기를 잡고 이리저리 몰아가며 장난을 쳤다. 학교 씨름장 모래놀이 경험을 살려 물길을 내는 놀이도 하였다. 씨름장과 다른 점은 물이 흙탕물이 아닌 맑고 투명한 물이었다.
아빠와 아저씨들은 낚시 도구를 가지고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던 낮은 산 쪽 깊은 물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빠! 거기 가지마!”
나는 엄마의 당부가 떠올라 아빠와 아저씨들에게 소리를 쳤다. 아이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고 자리를 잡아 낚시를 시작했다. 낚시는 저녁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몇몇 아저씨들을 통해 한가득 물고기를 가져오긴 했는데, 이 아저씨들은 밤새 낚시를 할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 같았다.
엄마들은 저녁밥을 짓기 시작했다. 냄비에 씻은 쌀을 넣고 부탄가스가 들어있는 부르스타를 켜 냄비를 가열했다. 냄비 뚜껑에는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는데, 이렇게 해야 밥이 설익지 않는다고 했다.
아까 운반한 큰 돌 사이에 나무와 숯불, 조개탄 등을 넣고 그 위에 그물처럼 생긴 석쇠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사람 팔뚝만 한 고기를 하나씩 올려놓으며 굽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기를 굽는 소리와 연기는 서늘한 강가를 메우고 강을 따라 멀리 흩어졌다. 다른 아줌마는 가져온 김치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먹기 좋게 썰어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미리 준비한 손가락만 한 고기를 듬뿍 넣고 팔팔 끓였다. 집에서 가져온 쇠젓가락과 숟가락을 강가에 가서 씻고 일회용 흰색 접시에 음식을 담아 네 가족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아마 우리 가족은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나머지 세 가족과 어울리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나머지 가족들은 종종 이렇게 휴가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곰분식 가족은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적한 강가에 와서 휴가를 즐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휴가를 가더라도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자고 음식을 먹었지, 이렇게 하늘 구름을 이불 삼아서 눕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렇게 밖에서 자도 되나,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나의 걱정과 달리 아무 일 없이 잠에서 깼다. 미처 치우지 못한 작은 돌들로 등이 조금 아팠을 뿐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바닥에 물기가 있었고 텐트 위에도 흥건한 물이 차 있었다. 전기집 아저씨는 그게 새벽 이슬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슬’이라는 말의 어감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가 아니지만 마치 비처럼 흔적만 남는 것이 마술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집안에서 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갑작스런 여행에 만족감을 느꼈다.
벌
오전에 아빠를 따라 강가 아래를 구경하려고 했다. 짧은 다리를 이곳저곳 두들겨가며 강의 아랫쪽을 탐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오른쪽 이마를 관통하는 아픔이 느껴졌다.
“아!!!”
아빠는 비명을 지르는 나를 들쳐 업고 텐트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동네 사람들도 놀라 모두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문방구 아저씨가 내 이마를 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벌에 쏘였구만, 별일 아니니 괜찮아.”
벌? 그리고 별일이 아니라니? 책에서 봤을 때 벌에 쏘이면 독이 온몸에 퍼질 수도 있다고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다섯 살 때 우리 가족은 봉천동으로 이사 오기 전 전농동이라는 곳에 살았었다. 거기에 전농동 사거리라는 큰 사거리가 있었고 우리집은 그곳에서 올라오는 언덕에 있었다. 아빠의 말로는 그 집에는 주인집이 있고 우리는 그 옆에 작은 셋방에 살았다고 했다. 어느 날 그 주인집 아들과 놀다가 흰색 석조 계단에 솟아 있는 뾰족한 곳에 이마를 박았다. 그 모양은 마치 알라딘이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보는 건물 윗부분 혹은 그냥 똥 모양처럼 생겼다.
극심한 고통에 더 놀랐던 것은 흰 계단 위에 피가 철철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업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 역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를 들쳐 업고 전농동 사거리까지 뛰어가서 병원으로 데려갔었다.
나는 아직도 그 수술실을 기억하고 있다. 의사 선생님은 초록색 비닐옷과 머리에도 비슷한 색깔의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고 내 상태를 보고 이야기하셨다.
“어이구 많이 찢어졌네, 한 7바늘은 꿰매야겠는걸.”
이마를 꿰맨다는 것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어떻게 옷처럼 실과 바늘로 사람 피부를 꿰맨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취였는지 아니면 무서워서 그랬는지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우리 집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벌에 쏘이더라도 이마에 무언가 상처를 주는 것에 엄청난 아픔을 느꼈다. 응급처치로 물로 살살 붓기를 가라앉히고 침을 빼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지갑에 있던 흐물흐물한 주민등록증으로 이마를 살살 긁어냈다. 주민등록증이 딱딱한 질감이 아니어서 쉽게 빠지지 않았지만 몇 번 시도하니 아주 작은 침을 빼내고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침이야. 엄청 작지?”
“그런데… 무서워..”
과속방지턱을 만들자
동네 사람들과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 조금 더 돈독해진 것 같았다. 각자 일이 끝나면 곰분식에 모여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마침 우리집이 식당을 하고 있었기에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문방구집, 전기집 애들도 곰분식 방에 모여 함께 비디오를 봤다.
영화보다는 만화를 주로 봤는데 그때 새로 생긴 ‘서울방송’에서 하던 ‘슈퍼마리오’를 주로 보았다. 버섯왕국의 데이지 공주가 쿠파라는 초록색 괴물한테 잡혀가고 빨간색 마리오, 초록색 마리오 형제가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인데 비디오에서는 마리오를 루이지라고 불렀다.
어른들이 밖에서 한참 술을 먹다가 노래방을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전기집 아저씨가 오천 원을 주면서 비디오를 마음껏 빌려보라고 쥐어주었다. 우리는 신나서 비디오가게로 달려간 후 슈퍼마리오를 빌렸다.
그리고 돈을 낸 아저씨는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들, 아저씨가 비디오값 줬으니 그거 보고 감상문 써라. 내일 검사할 거야.”
한창 술이 오른 채 아저씨는 선생님처럼 말하고 사라졌다. 우리도 반쯤 그 말을 믿으면서 열심히 비디오를 봤는데 결국 다음날 숙제 검사는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큰 사건이 생겼다. 전기집 아들이 우리 동네 가게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도로를 건너가다 그만 차에 치인 것이다. 그 도로는 양옆으로 가게들이 모여 있고 베르네천을 건너는 다리와도 연결된 길이다. 차도 많이 다니지만 차보다 사람이 더 많이 건넌다. 횡단보도도 없고 신호도 없는 그냥 동네 길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차를 빠르게 달리면 안 될 일이었다. 물론 그 길이 베르네천 반대 방향으로는 언덕이어서 마음을 놓으면 빨리 달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까치울이란 동네는 애들이 많이 살아도 너무 많이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곰분식에 모여서 회의를 했다. 아무래도 언덕에서 베르네천으로 내려가는 차들이 속력을 낮추지 않는 문제가 가장 컸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차량의 속력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회의를 통해 사고가 난 지점에 두 개의 과속방지턱을 만들기로 하였다.
공사 비용은 동네 사람들끼리 조금씩 내기로 했고 공사는 직접 하기로 했다.
1991년 여름, 일요일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은 양쪽 입구를 막고 방지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트럭으로 시멘트 포대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바퀴가 하나밖에 없는 수레로 자갈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자갈과 모래를 쏟아부어 볼록하게 만든 후 그 위에 시멘트를 부어 단단하게 굳게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삽을 이용하여 작업을 진행하였다.
아침에 시작된 작업은 점심을 넘어 해가 질 때쯤 끝이 났다. 이 공사를 추진하였던 아저씨들이 봉사를 하러 나온 분들에게 감사의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마도 재료를 사고 남은 돈으로 마련한 모양이었다.
“샴푸와 린스 그리고 비누 2개?”
조촐해 보이지만 주지 않는 것보단 나은 것 같다고 엄마가 말했다. 나 역시 선물의 크기보다는 아저씨들이 함께 모여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작업이 끝난 후 함께 곰분식에 모여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점점 이 까치울이라는 동네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가 10명 이상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밥을 먹고 다른 집에 놀러가는 것도 재미를 붙였다. 식사를 하고 있는 집이 있으면 저녁을 두 번 먹기도 했다.
“우주야, 혹시나 다른 문방구 가면 안 돼.”
동네 사람들끼리 친해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규칙이 생겼다.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를 가지 않고, 혹시 가더라도 문방구 아줌마·아저씨가 모르게 조용히 숨기고 곰분식까지 빨리 뛰어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