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여름 : 마일로를 아시나요?

by 최우주

마일로

항상 녹색 통에서 나를 유혹하는 너라는 녀석, 나는 흰 우유도 좋아하지만 너를 몇 숟가락 담아서 내 우유를 맛있게 만들고 싶어. 그런데 너는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어. 그것은 바로 찬 우유에 잘 녹지 않는 거야. 내가 너를 어떻게든 녹여보려고 노력했지만 완벽하게 하지는 못했어. 항상 숟가락에 남거나 컵 안 한쪽 구석에 다 녹지 않은 너를 발견하곤 했어. 사실 그건 이해할 수 있어. 그렇지만 우유를 마시는 동안 까끌까끌한 너를 만나는 게 좀 이상하지 않니?


그래도 그 검은 모래를 씹고 서서히 단맛을 느끼는 것은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알려줄까? 한 숟가락을 퍼서 그대로 우유에 담갔다가 들어 올리면 숟가락 위에 우유가 한가득 담겨. 그리고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녹색 통에서 봤던 너를 다시 발견할 수 있어! 이것을 반복하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만들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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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놀이를 ‘마일로 구출작전’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우유 속에 빠져 있던 너를 내가 여러 번 구출해 줄게. 물론 한 번 작전에 쓰인 숟가락은 다시 녹색 통에 집어넣지 않을 거야. 예전에 한 번 그냥 집어넣고 구출작전을 하려다가 엄마한테 혼났거든. 하여튼 다음에 또 보자. 그냥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찬 우유에도 잘 녹아 줬으면 좋겠어.



태권도

나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태권도장을 다녔다. 6살 때는 유치원을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 유치원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신기하게도 3층 지붕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아주 큰 미끄럼틀이 있었다. 6살 때는 너무 무서워서 그 미끄럼틀을 탈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나의 흥미를 끌 만한 장난감들이 많았다.


특히 내 얼굴만 한 블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블록으로는 주로 자동차를 많이 만들었다. 자동차를 만들어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아주 크게 만들어서 그 안에 탑승하는 놀이를 즐겼다. 주변 친구들은 내가 자동차를 만들 때마다 신기해하며 뒤를 밀어주며 놀았다.


집이 관악산 기슭 언덕길 쪽으로 이사하면서 유치원을 끊고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태권도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과 똑같이 방에서 공부도 배웠다. 태권도장이 유치원보다 좋았던 이유는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는 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색 고무 매트는 내가 아무리 뛰어도, 장난을 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술래잡기, 말뚝박기 등을 하며 뛰어놀았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미술을 배우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미술대회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나는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정읍으로 가는 9시 차 버스’에 대해 그리기로 했다. 9시 차는 그야말로 밤을 달리는 날쌘 사자와 같았다. 물론 중앙고속 옆에 그려져 있던 그림도 한몫했던 것 같다.


내가 그린 그림에는 터널을 지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좌석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운전하는 기사님, 그리고 터널 위를 지나가는 오토바이까지 그렸다.


그렇게 나만의 작품을 내고 얼마 뒤, 상을 받으러 오라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도 63빌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와 엄마는 태권도장 봉고차를 타고 상을 받게 된 친구들과 함께 63빌딩으로 향했다. 20분 정도 도로를 달리자 황금색으로 번쩍번쩍한 건물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다더니, 나의 상상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크기였다.


우리 봉고차는 주차장을 찾아 수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내가 출품한 작품처럼 어두운 동굴 속을 탐험하듯 끝도 없이 돌아 지하세계로 들어갔다.


나는 ‘금상’을 받았다. 엄마도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평소에 치마를 입는 적을 본 적이 없었는데, 아들이 상을 받는다고 하니 차려입고 오신 모양이었다. 나는 상패와 트로피도 함께 받았다. 상패 안에는 내가 그린 그림도 인쇄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을 받은 친구가 나뿐만은 아니었다. 옆에 앉아 그림을 그렸던 친구는 ‘은상’을 받았고, 심지어 나보다 더 큰 상을 받은 친구도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엄마, 그런데 이 상은 다 주는 거야?”


뭔가 이상했지만, 엄마가 느끼는 기쁨 앞에서 모든 것을 묻어두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단지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상까지 받을 줄 알았다면 내가 가장 잘 그리는 사과나무와 집을 그렸을 텐데, 전날 정읍에 급하게 다녀온 여운 때문에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고 결국 최우수상은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까치울의 태권도장

까치울에 이사 오고 나서도 학교 수업이 끝나면 태권도장에 다녔다. 관장님은 검은 피부에 귀를 덮는 장발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처럼 절도 있는 외모와 표정을 지녔다. 우리는 관장님의 아내분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사모님은 엄청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녔고, 특히 속눈썹이 길고 빳빳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손톱은 항상 길고 다양한 색의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엄마 화장대에서 보던 매니큐어를 떠올리며, 매일 붓으로 손톱을 하나씩 칠해야 할 텐데 참 부지런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두 분 사이에는 딸이 한 명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아빠와 엄마를 절묘하게 닮았지만, 이상하게도 엄마를 조금 더 닮은 것 같았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노란 띠를 받았다. 다행히 흰 띠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1년 동안 서울에서 수련을 했기 때문이다. 수련을 했다는 증거는 품새에 있었다. 나는 태극 2장까지 완벽하게 할 줄 알았고, 관장님께 태극 2장을 보여드린 뒤 당당하게 노란 띠를 받았다.


띠의 색깔은 이러했다. 처음에는 흰 띠, 그다음은 노란 띠, 그리고 녹색 띠, 파란 띠, 밤색 띠, 빨간 띠였다. 빨간 띠까지 수련하면 태극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품새는 모두 배우게 되고,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국기원에서 심사를 받으면 빨간색과 검은색이 반반 섞인 품띠를 받았다. 나는 그 품띠가 너무 갖고 싶었다. 품띠에는 이름과 체육관명을 새길 수 있었고, 길이도 기존 띠보다 훨씬 길었다. 띠를 매는 방법도 달라서 배에서부터 띠를 대고 한 바퀴 둘러 허리를 묶은 뒤, 남은 띠를 앞으로 가져와 묶었다.


품띠 다음은 검은 띠였다. 관장님과 사범님, 그리고 몇몇 형들이 가지고 있었다. 품띠처럼 이름을 새길 수 있었고 길이도 길었다. 그래서 품띠는 빨간 띠와 검은 띠의 중간쯤 되는 띠라고 이해했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 심사를 통해 승급했다. 승급을 하려면 태극 1장부터 8장까지를 완벽하게 소화해야 했다. 심사에 합격하면 큰 비닐 안에 들어 있던 새 띠를 꺼내 기존의 띠와 바꿔 맸다.


나보다 더 큰 형들은 겨루기를 했다. 말 그대로 발차기로 싸우는 것이었다. 나도 좀 더 크면 겨루기를 하게 될 테지만,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몇 번 동생과 발차기로 장난처럼 싸우다가 뼈끼리 부딪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청난 고통을 경험했다.


태권도장은 목요일에는 겨루기를, 금요일에는 닭싸움을 했다. 한쪽 발을 손으로 잡고 다른 쪽 다리로 콩콩 뛰며 상대의 손을 놓아 두 발이 땅에 닿게 만드는 게임이다. 접은 발의 무릎은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고, 우리는 무릎으로 서로의 다리를 열심히 공격했다. 그렇게 팀을 나누고 최후의 승자가 나올 때까지 닭싸움을 했다.


우리 도장은 조금 엄격한 편이었다. 태권도는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의와 몸을 보호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강조했다. 나쁜 사람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배웠고,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하면 벌을 받거나 맞기도 했다. ‘엎드려뻗쳐’라는 자세로 땀이 툭툭 떨어질 때까지 손을 짚고 자세를 유지했고, 막대기로 회초리를 맞거나 손바닥을 맞는 일도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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