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가을 : 엄마의 배

by 최우주

류옥선

내 이름은 류옥선, 나는 1960년 봄 정주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정주’라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이름이 ‘정읍’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곳의 봄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아름다운 곳이었다. 노란 개나리와 분홍빛 진달래는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꽃은 목련이었다. 다른 꽃에 비해 크기가 커서 마음에 들었다.


“꽃이라면 이 정도 크기는 돼야지”


그리고 돌담 사이에서 빼꼼히 머리를 드러내는 것이 귀여운 맛도 있었다. 무언가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단정하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우리 아버지는 드물게 외동아들이었다. 다른 집 친구들은 친척이 많아 북적거렸는데 우리 집 친척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만 해도 2명의 오빠와 1명의 남동생 그리고 1명의 여동생이 있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내가 봐도 참 잘생긴 외모를 가졌다. 흰 피부와 좋은 풍채를 가졌고 훈훈한 인상과 밝은 성격을 가진 분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우 어릴 적에 결혼했다. 언젠가 결혼식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엄지손톱만 한 사진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결혼식은 지금과는 다르게 전통혼례로 치러졌었다. 어머니는 볼에 연지곤지를 찍고 맞절을 하고 잔치를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같이 살지 못했다. 누구나 그랬듯이 가난했던 시절에 우리 다섯 남매를 두 분이 키우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나와 둘째 오빠는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안타깝게도 우리 오빠는 심하지 않은 소아마비 증상을 앓았다. 다행히도 몸을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말이 어눌하고 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몸이 온전해 보이는 자녀만 키우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까지 오빠랑 같이 오게 된 것은 오빠를 도와서 살라고 하기보다는 나 역시 몸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5살부터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은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병원도 다녀보고 한약도 먹여 보고 유명하다는 점집도 찾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버버 한 채로 오빠와 함께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었다. 말이 어눌한 오빠와 말을 전혀 못 하는 동생이 함께 서로 의지하며 시골에서 생활했다. 그래도 우리 할머니는 우리 두 남매를 열심히 키워 주셨다. 덕분에 문제는 있지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 아침에 일어났는데 평소와 다르게 볼과 혀의 움직임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청각장애로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 들어서 배웠던 말과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배웠던 말을 좀 더 유연해진 혀에 실어서 말을 해 보기로 했다.


“하… 하나… 두…”


귀에 들리는 내 분명한 목소리에 다시 말을 하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후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증상이 호전되어 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드디어 정확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왜 나는 벙어리가 되었을까? 아직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마도 어릴 적에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충격이 너무 커서 기억과 함께 말을 함께 잃었는지도 모른다. 기적적으로 말을 하게 된 나와 달리 오빠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사실 오빠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건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로 몸을 쓰는 일을 많이 했다.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거나 돌을 깎아서 벽돌을 짓고 공사를 하는 일을 도왔다. 당연히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와 달리 나는 말을 하게 되면서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보는 시험마다 좋은 성적을 냈다.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단숨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부모님과 살고 있는 나머지 형제들의 사정도 조금 나아졌다. 큰 오빠와 막내도 대학을 가고 내 여동생까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게 되었다. 나도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산 부모님께 대학을 보내 달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자녀들은 꼭 대학까지 보내고 가능하다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서울대에서 교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일하고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구로공단에 있는 빵 공장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빵은 땅콩크림빵이었다. 두 개의 식빵을 준비한 후 그 사이에 땅콩크림을 바르고 다시 덮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하루에도 쉴 새 없이 빵을 만들어 냈다. 무더운 여름에는 작업장에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에 의지하여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빵에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 모자를 쓰고 가운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더위가 더 극심했다.


21살이 되던 해 빵 공장 언니의 주선으로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검은 피부, 삐쩍 마른 몸에 매우 큰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솔직히 그 인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되도록 빨리 돈을 벌어서 공부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다. 특히 부모님과 살던 형제들처럼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술이 원수인지 그 만남 이후로 나도 모르게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22살, 결혼을 하고 난 이후로 내 꿈은 사라졌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리고 경기도 안양에 작은 중국집을 열었다. 그때쯤 나는 우주를 갖게 되었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이 심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먹는 즉시 토하고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입맛이 돌아오고 식욕이 폭발하였다. 중국집을 한 탓에 짜장면을 많이 먹었다. 우주 아빠는 하루에도 세 번씩 나를 위해 짜장면을 만들었다.


그렇게 1984년 3월 드디어 출산할 때가 다가왔다. 산통이 있어 아침에 병원에 들어갔는데 배만 아프고 이 녀석이 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0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우주를 낳았다. 내가 짜장면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정말 새까맣고 조그마한 아이가 태어났다. 남편은 간식을 사러 나갔다가 깡패를 만나서 죽을 뻔했다는 둥 이상한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죽을 뻔했던 사람은 나였다.


한 번 더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잠을 자지 않는 아이를 달래서 겨우 재웠고 그렇게 피곤에 찌들어 세 명은 잠을 잤다. 그런데 우주가 또 울기 시작했다. 나와 남편은 아기가 운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밖에서는 이를 이상하게 느낀 주인집이 문을 두드렸다.


“이봐 새댁, 아기가 너무 울잖아.”


집주인이 문을 두드리는데도 우리 부부가 반응이 없자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하고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개방했다. 방 안은 연탄가스로 가득 찼다. 아이는 계속 울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입에서는 거품을 흘리고 있었다. 방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지금도 내 오른쪽 종아리에는 데인 자국이 남아 있다. 그 자국은 심하게 괴사 해서 종아리를 잘라내야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몇 달이 지난 후 다행히 새 살이 올라왔다.


그 후 어떤 큰일이 일어날지 몰라 우리는 부모님이 있는 정읍에 내려갔다. 터미널에 작은 담배가게를 열고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우주가 5살이 되던 해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이라는 곳으로 이사 갔다. 전농사거리 언덕의 정점에 있는 집이었고 1층 셋방에 살았다. 그때부터 남편은 주변 예식장에 취직하여 직장을 다녔고 나도 부업을 하면서 육아를 했다.


어느 날 우주가 주인집 아들과 놀다가 이마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나는 아이를 들쳐 업고 전농사거리에 있는 병원까지 뛰어갔다. 사실 그 주인집 아들이 우리 아들을 밀쳐서 이마가 다친 것을 보았는데 주인집이라 별말을 하지 못했다. 아들이 다친 것도 속상한데 말을 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마음이 울컥했다.


이 사건 이후 다시 우리 가족만으로는 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가에서 조금 큰 집을 얻어서 아직 결혼을 안 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함께 살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대가 가까이 있는 데다 확실히 형제들과 함께 있으니 안정적이었다. 아이들도 이모와 외삼촌을 잘 따랐다. 우주는 6살에 유치원을 보냈지만 7살까지 보내기에는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아이니 보육과 교육을 같이 할 수 있는 저렴한 태권도장에 보냈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결혼하러 집을 나가기로 했다. 우리 가족도 단독으로 살 수 있는 집을 찾다가 관악산 입구까지 올라갔다. 서울에 사는 것은 좋았지만 이곳에서는 마땅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특히 작은 식당을 열고 싶었지만 이미 식당은 너무 많았고 좋은 공간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남편의 작은집, 즉 시아버님의 동생네 가족에게서 부천으로 이사 올 것을 권유받았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 조금 망설여졌지만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곳에 식당을 열게 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중국집을 한 경험도 있고 분식이라면 특별히 요리할 것도 많지 않기 때문에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1990년 겨울 까치울이라는 동네로 이사했다. 마침 우주의 초등학교 입학도 예정되어 있어서 빠르게 이사를 결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을 구하지 않고 가게를 알아보았다. 식당이 없는 상점들이 많은 곳이어야 했다. 까치울사거리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지만 그래도 식당이 없는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집을 따로 얻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깊숙한 곳에 방을 만들고 조리실을 구성했다. 그리고 남는 공간에 홀을 크게 지정하여 식당의 외형을 갖추었다.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봉천동에서 잘되는 식당 이름이 떠올랐다. 그 집이 너무 음식을 맛있게 해서 아이들과 돈가스를 자주 먹으러 갔었다. 그 집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곰분식’이라고 짓기로 했다.


식당은 내가 예상한 것처럼 매우 잘되었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아파트와 건물이 많이 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점심 장사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 주로 빠르게 소비할 수 있는 메뉴로 구성했다. 공사장은 함바집을 운영할 만한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가게를 찾을 것으로 생각했다.


가게를 열고 처음 가을을 맞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더위가 가시지 않아 홀에는 선풍기를 틀고 군데군데 날아다니는 파리를 쫓아냈다. 11시쯤 주문 전화가 걸려왔다.


“곰분식이죠? 혹시 라면 30인분 배달되나요?”

“30인분이요?.. 다 불을 텐데…”


그 순간 중국집의 간짜장을 생각해 보았다. 소스와 면을 따로 분리해 가면 되지 않을까?


“아! 가능합니다. 어디시지요?”

“여기 수정빌라 공사장이에요.”


전화를 끊고 얼른 슈퍼에 가서 부족한 라면을 박스로 구매했다. 그리고 곧바로 면을 삶았다. 30인분이라서 물이 끓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물이 끓어 라면을 투하하여 면을 삶아 냈다. 라면은 물 조절이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양을 끓일 때는 신중해야 했다. 면을 건져 내어 불지 않도록 보관한 후 끓인 물을 조금 덜어 내어 다시 스프를 넣었다. 맛을 보면서 적당한 맛이 나도록 국물을 만들었다.


엄마의배.png


수정빌라 공사장은 곰분식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남편은 면과 그릇을 들고 나는 국물을 운반하기로 했다. 국물이 식지 않기 위해 뜨거운 철통을 들고 가야 했고 손에 들고 가기보다는 머리에 수건을 대고 지고 가기로 했다. 공사장 앞에 도착해 보니 어제 비가 와서인지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남편과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한 발씩 움직였다. 그러다가 나무 발판을 하나 밟았는데 그 나무가 진흙 가운데로 푹 들어가고 말았다.


“아!!!!”


나는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졌고 뜨거운 국물이 내 배 위로 쏟아졌다. 순간 배가 아픈 것보다도 라면을 버리게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남편과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인부들이 달려 나왔다. 배에 닿았던 국물을 제거하고 인부가 사용하던 수건으로 배를 감쌌다. 공사장 관리소에 있는 전화로 119에 신고를 하였고 하얀색 구급차가 나를 실어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의 배

나는 학교를 다녀와서 엄마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면을 배달하다가 넘어져서 배에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울고 있는 나를 옆집 이발소 아줌마가 달래 주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방에 들어가서 엄마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엄마는 저녁이 안 되어서 배에 붕대를 감고 나타났다. 다행히 배의 일부만 국물이 쏟아졌고 다른 부분은 아주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엄마는 붕대를 가리키며 별일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내 옆을 지나가는 바퀴벌레를 손으로 딱 내려치며 잡았다.


“이놈의 바퀴벌레 또 기어 나오네.”


징그러운 바퀴벌레를 아직도 잡을 수 있으니 엄마의 건강은 크게 문제없을 것이라고 안도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붕대를 열어 화상 입은 배를 보여 주었다. 배꼽 옆 살 위로 벌겋게 부풀어 올라서 물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엄마는 그것을 닦아내는가 싶더니 다시 손으로 쥐어 물이 더 흘러나오게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미간을 찌푸렸고 내가 아픈 듯이 나의 눈썹도 들썩거렸다.


“엄마 안 아파?”


“아픈데 참을 만해. 그런데 아직도 라면이 아까워.”


그리고 연고를 바르고 다시 반창고를 덧대어 치료했다. 그렇게 엄마의 배는 가을 내내 부풀어 오르고 짜내기를 반복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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