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와 잡념 사이
우리집은 원래 검소했다. 여전히 검소하고. 아빠는 직장 생활 전성기 때도 이마트 구두를 신었다. 그냥 신었나? 구두가 다 떨어져 찢어질 때 까지 신었다. 신을 수 없을 지경으로 너덜너덜해지면 다음 구두도 이마트에서 골랐다. 엄마는 당신 나이에 이런 구두 신으면 남들이 수군댄다며 만류했지만 아빠는 백화점 구두나 이마트 구두나 착화감에 차이를 못느끼겠다며 비싼 매장에서 비싼 구두 신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여겼다.
"대체 다들 얼마나 잘 벌길래 저런 구두를 사서 신는거냐?"
대학 입학 후 하나 쯤은 다 있는 친구들의 명품가방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대체 다들 얼마나 집이 부자길래 저런 가방을 사서 들까? 우리집이 가난해 죽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백화점에서 물건 척척 살 정도로 잘 살진 않는데 친구들은 얼마나 잘 살길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까 싶었다. 나는 대학 졸업식 때도 지금은 부도가 나서 망한 쌈지 핸드백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몇몇 어른들은 푼돈 잘 아끼고 절약 잘 하고 명품 욕심 없는 날 더러 잘 컸다고 칭찬했다. 적어도 5-6년 전 까진 그랬던 것 같다. 욕심 부리지 않고 아끼고 산다는 것은 칭찬 받는 일이었다. 근검절약은 착실한 청년, 바르게 잘 큰 사람의 미덕, 나 또한 그 타이틀이 자랑스러웠고. 근데 요즘은, 요즘도 그런가? 그니까 요즘 우리는 안아끼는게 트렌드 맞지? 언제부턴가 아끼고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처럼 되어 버렸다. 미국 오고 우리 부부 모토는 절약인데 나중에 더 잘 먹고 잘 살 기반을 닦는다 생각하고 아끼고 또 아끼며 산다. 아주 잠깐 있을게 아니니 당장 근방 여행지 다 격파하자며 조급하게 다닐 필요가 없는 것도 맞지만 그렇게 놀러다니며 살 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예상보다 과하게 얻어버린 렌트도 부담이고 각종 보험과 공과금 고지서도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날라온다. 한국에 꾸준히 부어야 할 돈도 있고 이래나저래나 내가 일을 쉬니 벌었던 만큼 맘은 더욱 쫄린다.
근처 맛집 검색하면 너나 할 것 없이 화려한 후기가 줄을 이룬다. 약간의 휴식일을 챙기며 소소한 브런치 데이트를 즐기는 것 외에는 한국에서처럼 외식도 즐기지도 않다 보니 주변에서 화려한 미국라이프? 를 기대하는 것에 비해 전하는 후기와 소식도 심심한 편. 그런 내게 "기특하구나",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계획을 갖고 살아가다니 잘하고 있구나" 라고 말해주는 이들이 없다. 돈이야 다시 금방 버는데, 갚는데, 어디도 가보지, 어디는 가봤어? 이거 먹어봤어? 이 것도 먹어보지, 근처에 미슐랭 뭐가 있는데 그것도 먹어보지, 가보지, 거기 또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게 아닌데 지금 있을 때 지르지, 가보지 대개 반응은 그렇다. 절약이 더이상 미담은 아닌가보다. 인스타 블로그 유투브 각종 후기와 라이브중계가 흘러 넘치는 판에 절약은 절대 매력적인 콘텐츠가 못되나보다. 내가 지른 것, 내가 쓴 것, 내가 산 것, 내가 먹은 것, 내가 다녀온 곳만 화제가 된다. 치솟는 집값엔 다같이 분노하면서 해외여행과 외식, 구매는 찬양하고 따봉하는 요즘은 확실히 절약보다 소비가 추앙 받는다.
어떻게 사는게 잘 사는 걸까. 삶의 자세를 돌이켜 볼 때마다 내가 목표하는, 내가 가진 기준들이 올바른 설정인지 자잘한 고민들이 피어 오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앞으로도 잘 사는 길일까. 새롭게 사귀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새로운 정착에 소비는 어디까지 허용 될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하게 발생하는 이벤트와 도전, 새로운 경험들은 모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는 계속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잘 놀고, 잘 먹고, 잘 쓰고, 잘 익히며 잘 살 수 있을까? 남편이 그러더라. 지금 하는 사색마저도 시간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사치이니 많이 즐기라고,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소비 중이라고. 자긴 요즘 너무 바빠서 일 말고 다른 건 생각 할 시간도 없단다. 그게 혼자 속 편한 거다 이 사람아.
그리 숨가쁘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 사는 대륙만 잠시 바뀌었을 뿐인데 몸이 자꾸 관성을 찾는다. 사람 사는게 다 똑같지만서도 같은 듯 너무 다른 이 곳에서 별 생각 없이 숨쉬듯 소비해온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정립해보게 된다. 그리고 자꾸 고민 된다. 여기에서도 돌아가서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출퇴근이 없는 삶 속 과한 여유가 공허한 물음표를 만들어 낸다. 여러모로 값비싼 삶을 소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