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유진 Sep 12. 2023

언제 행복한가

한 번은 언제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시에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몇 가지가 있었다.


확실한 것은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가 맛있을 때 행복한 기분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하루 중 가장 쾌활하고 기분이 고조되는 무렵이 커피와 함께하는 오전이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 하루를 시작할 커피를 고를 때 기분이 좋다. 고민의 결과라고 해봤자 대체로 따뜻하거나 차가운 아메리카노 둘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출근길 그날의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들고 어스름한 아침 햇살이 드는 회사 로비를 총총 가로지를 때면 신이 나서 입가에 미소에 지어지곤 한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불어오는 맑고 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다. 근래에는 미세먼지 탓에 더 이상 소소한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산속에 있는 학교를 다닐 때 즐겨 찾았던 기숙사 1층 카페는 아침이면 한쪽 벽을 차지한 슬라이딩 도어를 활짝 열어두어서, 선선한 바람이 고소하고 짙은 원두 향기와 섞이며 너무 매캐하지도 너무 습하지도 않은 기분 좋은 공기를 유지하곤 했다. 기숙사 내 방 창문은 거의 사계절 내내 조금씩 열려 있었다. 밤이면 새카만 산등성이와 쪽빛 하늘의 희미한 경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고요히 흘러들어왔다. 지금도 가끔은 그 시절 작지만 쾌적했던 산속의 기숙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집을 지키는 두 고양이들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그르릉 소리를 내면서 나의 존재를 반기면 또 행복감을 느낀다. 동그란 눈이 마주칠 때, 복슬복슬한 등과 꼬리가 근처에 있을 때 그 자체로도 웃음이 나곤 한다.


언제 행복하냐는 질문 다음에는 언제 짜릿한 기분을 느끼냐는 질문도 있었다. 아마도 평일에는 회사와 집만 오가고 주말에는 책만 읽으며 젊음을 탕진하는 젊은이로 보였기에 받은 질문인 것 같다.


한동안은 일에 몰입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 가장 쾌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회사의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기에, 갑판 위에 서있는 듯한 감정적 동요와는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다.


나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데서 삶의 원동력을 찾는 편이다. 그게 아니라면 멋진 책이나 영화, 예술 작품을 본 직후에, 이렇게나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류애를 느끼면서 작품에 대한 소감을 친구들과 주고받을 때 여가생활의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별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이 내가 일상을 유지하는 소소한 행복이다. 감사하게도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들이다. 그러나 이런 행복의 조건이 모두 충족된다고 하여도 삶은 여전히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허전하거나 불안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복 자체가 처음부터 아니면 어느 시점부터 감히 추구할 수 없게 된, 그들 스스로 지워버린 삶의 목적 중 하나임을 안다.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행복할 권리가 없거나, 떳떳하게 행복을 누리는 일이 가당치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의 조건을 묻는 질문을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보다도, ‘지금 진정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라는 문장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관해서는 어쩐지 자신 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곧 불행의 원인일 것이다. 나는 일상에서든 비일상에서든 내가 행복을 위해 꾸미는 사소하고 많은 일들이, 실은 행복을 추구하는 일과 불행을 제거하는 일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알기 어렵다.


만약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은 한 몸과 같아서 반으로 쪼개어 나눌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 기쁘고 행복하려는 노력과 더 이상 슬프고 불행하지 않으려는 노력 역시 모호한 경계 속에서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최종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순환의 과정에 가까울 것이다.


그 엉겨 붙은 덩어리 속에서 구르며 살아가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잘 지내다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