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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Sep 04. 2023

잘 지내다가도

마음이 회복되고 있다는 징조는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


어느 날 진료실에서 평상시처럼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을 듣고 나서, 문득 왜 이런 질문을 받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처음으로 찾아들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진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등 뒤에 달고 왔던, 정신과 의사 앞에서 너무 음울하지도 너무 명랑하지도 않은 적당한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려고 애쓰던 어떤 그림자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잠시 멍하니 앉은 채로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아서 대답을 기다리던 의사 선생님도 그걸 알아차렸던 것 같다.


그날이 아마도 마침내 약물 치료를 서서히 중단해 봐도 괜찮겠다는 말을 듣고 보건소를 나섰던 날일 것이다. 그 순간을 제법 절실히 기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기뻤다거나 후련했다거나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날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언제 끝나도 후회 없는 삶을 살자는 다짐이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체념으로 바뀌어가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처럼, 길이 너무 완만했던 나머지 반환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차츰차츰 괜찮아지던 나는 어느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매일 잘 지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딱히 삶의 이유를 찾아서라기보다는 그게 별로 중요지 않게 되어서 잘 지냈던 것이다. 가끔씩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우울해지곤 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가슴이 뻥 뚫려서 그 구멍으로 차갑고 검은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조금 전까지 함께 했었던 소중한 존재들이나 즐거웠던 시간들이 불현듯 빛을 잃고 흐려져서, 당장 그 순간의 괴로움이 아닌 나머지는 어둡고 좁아진 시야 바깥으로 순순히 밀려나버리는 그런 밤들이, 마지막으로 진료실을 나섰던 날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는 너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게 전처럼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 다음 날 아침이면 잊어버릴 수 있는 잠깐의 악몽 같은 것이 되어서 병원에 다시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뿐이다.


사람들이 둘 중 무엇만 보든지 간에 나는 나 자신의 밝음과 어두움을 양손에 돌처럼 쥐고 있고, 이따금 양쪽의 무게를 비교하면서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무거워지지는 않았는지 계속 살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내 글을 가장 많이 읽을 사람은 나 자신이다. 다시금 마음이 울적해지면 내 머릿속에는 내가 썼던 글이 가장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결국 글을 쓰는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잘 지내보자고 당부하기 위해서라는 부끄러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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