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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Aug 28. 2023

이사 가고 싶은 마음

언젠가부터 혼자 쉴 때 심각하고 진지한 영화보다는 다소 상투적일지라도 밝고 유쾌한 시트콤이나 로맨틱코미디를 보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시작부터 산뜻한 음악과 화사한 배우들의 얼굴을 통해, 앞으로의 한두 시간 동안은 나를 긴장시키거나 눈물짓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하는 작품들 말이다. 직장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몰두하다가 겨우 퇴근하는 날이 잦아질수록 그랬다. 심오한 작품을 보는 날은 다이빙을 앞둔 것처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무가치하고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가령 집에서 홀로 영화를 보는 시간이 주는 안정감 같은 것들을 말이다. 따뜻하고, 어둡고, 품에 끌어안은 이불과 쿠션에 코를 묻으면 익숙하고 포근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공간에서 편안하게 영화를 볼 때의 안전한 기분을, 나는 사랑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게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자꾸만 나중의 일로 미루곤 했다. 몸이든 마음이든 피곤하고 무력해지면 그제야 하릴없이 헝클어진 채 침대에 파묻혀 있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가 집이라는 공간과 그 안팎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쉽게 피로해지는 편이다. 그래서 집과 너무 멀어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가롭게 슬리퍼를 꿰어 신고 갈 수 있는 거리에 산책하기 좋은 공원과 조용히 책 읽기 좋은 카페가 있을 때 마음이 흡족해진다.


그동안 이사를 제법 많이 다녔다. 처음에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썩 좋기만 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런 데서도 살아보고 저런 데서도 살아보는 것도 다 경험이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돈이 모이기 시작한 뒤로는 조금씩 더 괜찮은 집,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옮겨 다녔다.


오랫동안 자연보다 도시로의 여행을 선호했던 것이, 결국 동경할만한 새로운 장소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 작은 강이 흐르는 도시의 경치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그곳에 살아보기를 꿈꿨었다. 그 당시 내가 살고 있었던 본가의 동네는 당연히 그런 국제적인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위기는 둘째치고 살기가 불편했다. 지하철역에 가는 데만 삼십여 분이 걸렸다. 고양이가 들어오고 난 뒤 그곳에 눌러앉게 된 내가 도저히 여기서는 못살겠다며 직접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 결과 우리 가족은 장녀의 진두지휘에 따라 고양이를 들쳐 메고 대중교통만큼은 더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잦은 이사 덕분에 일상의 짐을 덜어내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아도 되는 잡동사니, 안 입는 옷들은 주기적으로 처분했다. 새로운 물건을 사는 데 신중해졌다. 미니멀리스트까지는 못되더라도 홀가분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반대로 삶의 규모는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이사를 간 집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를 더 입양하게 되었다. 그 무렵 대학을 졸업한 동생까지 본가로 돌아왔다. 네 명의 어른과 두 마리의 고양이, 도합 여섯 명마리의 가족으로 좁은 집이 터져나갈 판국이 되자 서둘러 더 넓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여유로운 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양이도 나도 충분한 햇볕을 받을 수 있는 큰 창이 필요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도 두고 싶고, 편안하게 기대어 책을 읽을 빈백 소파와 플로어램프도 두고 싶다. 어릴 때는 분명 방 하나여도 충분했는데, 왜 이제는 자꾸만 더 넓은 집에 살고 싶어지는 걸까.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아마도 정말로 정착하고 싶은 곳을 찾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살아보고 싶은 장소들, 벗어나고 싶은 장소들이 있다는 마음을 긍정적인 신호로 여긴다. 산다는 것은 어느새 당연해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으니까. 아름답고 쾌적한 곳들에 대한 동경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 착잡하고 불만스러운 심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부지런히 움직일 계기도 되어주었다. 귀찮더라도 또 이사를 갈 것이다. 그곳에서 더 만족스러운 일상을 꾸려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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