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자주 쓰기 위해 한때 취미로 영화 감상문을 썼었다. 사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우연히 그걸 건드린 영화를 보고 나면 스멀스멀 더듬어가듯 글로 적어 내려가곤 했다.
영화는 감독의 이야기고,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내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감상평 형식의 글을 특별히 쓰지 않게 되었다. 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책은 작가의 이야기지만 나는 내 이야기가 쓰고 싶다.
책장에 자살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세 권이 되었다. 첫 번째 책은 데이비드 밴의 <자살의 전설>, 두 번째 책은 임민경의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였다. 세 번째 책이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이다. 이번에는 제목에 자살 말고는 별다른 단어가 없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뭔가를 쓰게 되지 않을까 짐짓 오랜 시간 동안 기대했었다.
작가 르베는 젊은 시절 자살한 그의 친구에 대해 썼고,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내고 열흘 뒤 그 또한 자살했다. 이에 대해 역자 한국화는 “르베는 그가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이 책을 썼지만, 그 친구 역시도 르베의 삶을 구하지 못했다.”(122쪽)라고 말한다.
르베는 작품 속에서 시종일관 친구를 “너”라고 부른다. ”너”와 작가의 경계는 모호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존재도 점차 “너”에 섞여 들었다.
“네가 행복하거나 걱정이 없을 때 거울을 보면 너는 누군가였다. 불행할 때의 너는 아무도 아니었다.”(43쪽)는 문장처럼, 지금도 이따금씩 어떤 일들은 나의 중심을 수로처럼 관통해서 알맹이를 함께 휩쓸고 가버린다. 그러면 내가 이끌고 움직이는 것은 텅 빈 껍데기뿐이다. 나는 나의 유령이 된다.
어제는 꿈에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사가 나왔는데 어떤 손님이 홀로 가게에 들어오더니 그대로 지나쳐 곧장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황당해서 앉은 채로 식당 주인 얼굴을 돌아봤더니, 요즘 계속 있는 일이라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옆 식당에서도 누군가가 뛰어내리려고 하는지 바깥의 군중이 모두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바뀌었고,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식욕을 완전히 상실한 채 혼자 밖으로 걸어 나와 다른 골목을 배회하다가 꿈에서 깼다. 현실을 생각해 보면 아주 허황된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거의 30분마다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셈이기 때문에.
식당 주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유령을 어찌할 도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 내 책장에 자살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딱 한 권이었을 때, 부모님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말없이 그 책을 책등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서 꽂아 놓고 갔다. 뒤집힌 책이 남긴 것은 부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였다. 나는 그것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들 또한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너의 삶은 하나의 가설이다. 늙어서 죽는 사람은 과거의 집합체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한 것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너를 생각할 때는, 네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이 따라온다. 너는 가능성의 집합체였고 그렇게 남을 것이다.”(16쪽)
죽지 않아도 나는 아직 스스로가 “가능성의 집합체”라고 믿고 있어서, 그 가능성이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통해 유령에서 사람으로 되돌아온다.
남의 말에는 딴지 걸기를 좋아할지라도, 돌아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어야 한다. 그러면 책들은 바르게 꽂혀 있어도 나를 해치지 않고, 나는 깊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