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Apr 21. 2024

자기만의 오두막을 짓는 일

어른에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

의자에 이불을 걸쳐 만든 자그마한 공간에는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 그곳에선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하는 예의 바른 어린이 행세를 할 필요가 없다. 어른들이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가장 아끼는 인형과 둘이서만 속닥거릴 수 있는 곳. 초대하지 않으면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비밀의 장소. 자신의 힘으로 만든 최초의 안식처에서 우리는 자신과 만나는 법을 배운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져 본 아이들은 안다. 어떻게든 좁은 틈을 찾아 자기만의 고치를 만드는 행위가 무슨 의미인가를. 그것은 나만의 오두막에서 이야기를 짓는 일이자, 하얀 돛이 달린 커다란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항해라는 것을.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창조하든, 그곳에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밀기지 만들기」_오가타 다카히로(일본기지학회) 지음/ 노리타케 그림


가능과 불가능. 그 둘 사이를 저울질하는 건 어른들 뿐이다. 작고 완벽한 세계에서 선장이자 영웅인 아이들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을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랬던 아이는, 어쩌다 불가능의 세계에 던져졌을까. 그토록 작은 공간에서도 누릴 수 있었던 무한한 자유와 창조성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대화하고, 세상에 없는 멜로디로 노래하고,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시절. 그것이 타인의 눈을 가리는 이불로 만든 작은 공간 덕분에 가능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다시 의자를 세우고 담요를 꺼내 지붕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울프의 주장에 마음이 흔들린 것과 슬플 때 혼자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소혹성을 가진 어린 왕자가 부러웠던 것 말이다. 그들의 서사가 내게 준 메시지는 하나였다.


"너의 오두막을 다시 지어 봐!"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꿈꾸게 만드는 공간. 상처 입은 짐승이 홀로 치유의 시간을 보내듯 혼자서 통증을 견딜 수 있는 곳. 자기 안의 컴컴한 동굴로 들어가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도 괜찮은, 그런 오두막. 우리는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생에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돌봐야 할 순간도 있는 법이니까. 어쩌면 내가 그토록 공간을 원했던 건 쉽게 상처받는 연약한 인간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공간에 천착해왔던 그간의 시간과 마음을 돌아본다.  나를 찾기 위해, 내가 나임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시간들을. 그 부대끼는 몸과 마음을 오롯이 꺼내어 볼 수 있는 벽과 지붕을 바란 것을.


나의 첫 공간은 무척이나 작았다. 너무 작아서 의자조차 놓을 수 없었다. '공간'이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워 온 지구본 위에 망가진 물건들을 분해하여 만든 30cm 크기의 행성은 어린왕자의 소혹성을 흉내 내어 만든 장난감에 불과했다. 보드지를 잘라 만든 싱크대와 망가진 휴대폰 액정화면을 떼어 내 만든 티브이, 시계를 대신하는 금이 간 남편의 손목시계까지. 지붕이 없는 작은 소혹성은 공간에 대한 열망의 상징일 뿐, 진짜 공간은 아니었다.


소혹성 B613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나의 작은 공간. 그땐 살고 싶은 공간이 아닌 집의 재현에 가까웠다. ⓒ안녕


작업실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첫 공간마을도서관 한편에 방치되어 있던 2평 남짓한 창고였다. 아파트 관리동 3층에 자리한 마을도서관은 풀뿌리 비영리 단체 이름으로 다른 운영위원들과 함께 자원봉사로 운영하던 이었다. 계단을 올라 3층에 도착하면 정면으로 커다란 양문이 보이,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복도에 화장실과 창고가 있는 구조였다.


화장실 옆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창고는 바닥이 고르지 않아 경사가 졌고 벽면도 손이 잘못 스치면 상처가 날 만큼 거칠었다. 부피가 큰 비품이나 소모임에서 사용하는 재료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있곤 했는데,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퀴퀴한 냄새 때문에 꼭 필요한 물건을 꺼낼 때가 아니면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 방치된 공간이었다.


그랬던 창고가 변환점을 맞이한   붙박이장을 설치하고 나서였다.  쓰지 않는 비품들을 버리고 필요한 물건들만 붙박이장으로 옮기자 창고가 비게  것이다. 무언가를 하기엔 비좁고 더 이상 쌓아둘 물건도 없는 빈 창고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창고에 들어가 북향으로 난 작은 창문을 열어보았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자라는 몇 그루의 벚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 참새들이 가지를 오르내리며 푸드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짹짹짹짹" 소리가 창고 안에서도 선명히 들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벽을 칠하고 작은 책상과 의자만 놓는다면. 아늑한 작업실이 될 수도 있겠다고.


도서관 운영위원들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혹시 제가 창고 좀 써도 될까요?”


도서관 운영위원으로 몇 년째 함께 활동해 온 언니들은 화장실보다 더 좁은 곳에서 하려러나 싶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계속 비워둘 거면 제가 작업실로 좀 쓰고 싶어서요.


도서관이 문을 연 이래 나는 손으로 책 만드는 소모임을 운영하면서 재능기부로 수업을 했더랬다. 6개월 동안 수업료를 월 50만 원씩 내고 북아트 지도자 과정을 마쳤지만 대단한 지도자가 될 마음은 없는 때였다. 그저 매주 동네 엄마들과 모여 종이에 구멍을 뚫고 실을 꿰매 책으로 엮거나 혼자 책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끄적이는 일이 좋았다. 회원들이 매월 회비 겸 수업료로 내는 만 원은 도서관 운영비로 쓰였다. 


몇 년간의 무료 강의와 짐을 옮긴 후 창고가 계속 비어있던 탓에 굳이 반대하는 운영위원은 없었다. 그렇게 생애 첫 작업실을 구했다. 난생처음이자 (아마도)마지막일, 월세 없는 작업실이었다.


도서관에서 회원들과 작업했던 가죽 바인딩 ⓒ안녕
도서관과 집에서 만든 작품들로 매년 지역도서관과 거리에서 정기전시회를 열었더랬다. ⓒ안녕




언젠가 나만의 공간을 가진다면  푸른색으로 칠해보고 싶었다.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처럼 헤엄칠 수도, 날개를 펴고 바람을 가르는 새처럼 날 수도 없지만. 푸른 공간 안에서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페인트와 작업도구를 온라인으로 주문해 놓고, 신문지를 바닥에 깔아 두었다. 비닐 테이프도 창문에 붙여서 미리 작업 준비를 해두었다. 페인트가 도착하자마자 손에 목장갑을 끼고 칠을 시작했다. 적당량의 페인트를 트레이에 붓고 롤러에 묻히고 시멘트 벽에 W자로 칠해나갔다. 두 번 정도 겹쳐 칠하자 회색빛이던 벽면이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문의 앞뒷면까지 모두 청록색을 칠했다. 문을 닫고 안에 있으면 사방이 푸르렀다.


바닥에는 신발을 벗을 수 있도록 나무 무늬의 조립식 깔판을 깔았다. 낡은 철제 책상을 구해 빨간 시트지를 붙이고, 중고의자도 하나 얻어 들여놓았다.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합판 책꽂이까지 책상 위에 올려놓자 공간이 완성되었다. 좋아하는 책과 그림도구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온종일 음악을 들었다. 


창고 작업실을 찍어 둔 휴대폰이 망가지면서 사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곳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그림 한 장이 전부다.


월세 없는 공간에서 누린 꿈처럼 달콤했던 시절은 얼마 못 가 막을 내렸다. 몇 년간 무임금으로 활동해 온 관장님이 취업을 위해 떠나면서 마을도서관도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마을도서관과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도서관의 책장과 책을 차마 버릴 수 없어 새로운 공간으로 옮기고, 중고 커피머신을 구입해서 마을카페를 만든 게 이 즈음이었다. 개인 작업실은 사라졌지만 공간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기에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집에서는 책상을 두는 곳이 곧 작업실이었다. 1년밖에 살지 못한 19평 아파트에서도, 2년간 머문 25평 아파트에서도 내 책상은 어느 방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거실 언저리를 헤매 다녔다. 제사를 모시면서부터는 거실에도 둘 수가 없게 되어 6년간 베란다 살이를 했다. 그렇게라도 책상 둘 자리를 만드느라 고군분투했다.


지금은 안다. 그렇게라도 의자와 책상을 고집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작업실에 둥지를 틀 수 있었다는 것을.




삐걱거리는 식탁을 거실 한편에 두고 책상처럼 쓰던 시절. 36개월 할부로 산 넷북과 언니가 학창 시절 쓰던 타자기로 글을 썼다.
네 식구가 방 2개에 살 땐 책상 둘 자리가 없어서 남편이 쓰는 컴퓨터 책상과 내 책상이 모두 거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거실에 있던 책상이 베란다로 밀려나 작업실을 얻기 전까지 6년간은 베란다살이를 했다.

                    

월세 없는 두 평짜리 창고, 아파트 거실과 베란다, 사람들과 함께 운영하는 마을카페, 혼자 쓰는 다세대주택 투룸까지. 색깔도 모양도 다른 지붕 아래에서 내가 바랐던 꿈은 하나였다. 연약한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 껍질을 이고 다니는 민달팽이처럼 나를 보호할 껍질을 갖는 것. 그 안에서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었다.


소망해 본다. 당신에게도 그런 껍질이 하나쯤 있기를. 자신의 가장 보드라운 내면과 창조성이 함부로 할퀴거나 상처 입지 않을 수 있는 안식처 말이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항해를 떠났던 아이처럼 마음껏 쓰고,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가능과 불가능을 저울질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상상하며 자유롭게 유영하기를.




재개발을 앞둔 마을카페 3층의 빈집을 청소해서 월 10만원에 쓰던 시절. 코드 4개를 반복하는 어설픈 실력이지만, 공간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혼자 노는 힘을 길러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