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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21. 2020

33명이 함께 마을카페를 차렸습니다.

2013년에 설립하여 지금까지 운영 중인 마을 북카페 나무의 이야기를 매거진으로 시작합니다. 마을카페의 설립부터 365만 원에 한 셀프 인테리어, 월 매출 9만 원 적자를 어떻게 견뎌냈는지까지 7년 차 무임금 카페지기로 활동하면서 겪은 우여곡절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2012년에 설립된 서울시 마을공동체지원센터가 시작한 다양한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 중 북카페 설립 지원 사업이란 게 있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북카페를 설립하고 운영하고자 하는 주민 3명이 모여 신청하면 되는 거였다.     


주민이 직접 만드는 북카페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경기도민인 내게는 지원할 자격이 없는 그림의 떡. 배가 아프긴 했지만 그때 얻은 힌트는 '마을 카페를 만들고 운영하려면 3명 정도는 필요하겠구나'였다.        



 직접 종이에 구멍을 뚫어 제본실로 꿰매는 바인딩 작업.


당시 나는 한 아파트 관리동 3층에 위치한 마을 도서관에서 '책 만드는 엄마'라는 소모임을 4년째 운영하는 중이었다. 대여섯 명의 동네 엄마들과 매주 모여 다양한 형태의 책을 손으로 직접 만드는 수업이었는데, 도서관에서 진행한 여러 개의 소모임 중 가장 장수한 모임이었다.


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북아트 작업을 하려면 가끔은 실을 꿰어 묶기 위해 구멍을 뚫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뜨거운 여름이든 추운 겨울이든 무조건 망치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가 밖에서 망치질을 해야만 했다. 도서관이다 보니 조용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기도 했고, 바로 아래층에 관리소 직원들이 근무했기 때문에 소음이 발생하는 작업은 어쩐지 눈치가 보였다. 책을 만들다가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 먹기도 했지만 냄새가 풍길까 봐 그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럴 때 농담처럼 하던 말이 "우리도 작업실 있으면 좋겠다"였다.        


그렇게 농담 삼아 작업실 이야기를 꺼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마을 도서관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시에서 운영비 지원이 끊겼고, 임대료와 인터넷 요금이 연체됐다. 그동안 무임금으로 도서관을 지켜오던 관장님마저 생계 문제로 도서관을 떠났다. 인력도 재정도 모두 힘든 시기였고, 결국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대로 도서관 문을 닫기엔 마을에서 맺어온 인연과 도서관 한가득 꽂힌 책들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소모임 초기부터 몇 년간 함께 해온 두 명의 회원과 함께 작업실 겸 마을 북카페를 새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서울시 사례에서처럼 나를 포함해 3명이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았고, 인근 지역 상가에 북카페를 연다면 커피라도 팔아서 운영비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ㅜㅜ)


초등학교 시절부터 산포자(산수 포기자)였던 내가 대충 한 계산이니 오죽했을까마는, 당시엔 어떻게든 될 것만 같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 어설픈 계획에 두 명의 동네 언니가 맞장구를 치면서 2013년 봄, 마을 카페를 만들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존 도서관을 이용해온 회원들과 지역 사회에 마을 카페 설립을 알리고 응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온라인 카페에 우리의 계획을 알리고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했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성미산 마을카페 탐방도 가고,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출자자 모집도 시작했다.


계약을 며칠 앞두고 보증금이 모자라 마을 북카페 설립 소식을 알리던 SNS에 긴급 출자 요청을 했더니 꼭 필요한 만큼의 출자금이 들어와 무사히 계약을 치렀다.  


계약을 며칠 앞두고 보증금이 모자라 마을 북카페 설립 소식을 알리던 SNS에 긴급 출자 요청을 했더니 꼭 필요한 만큼의 출자금이 들어와 무사히 계약을 치렀다.


그간 마을에서 방과 후 공부방을 시작했을 때부터 후원해주시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아이들 손잡고 와서 책 읽어주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도서관 회원들, 마을 카페라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대로 응원해주던 지역 주민들, 오랫동안 일하던 단체를 떠나며 받은 거액(?)의 퇴직금을 투척한 남편까지.     


두 달간의 설립 준비 기간 동안 30명의 출자자가 동참하면서 마을 카페 설립은 탄력을 받았다. 먼저 마을 카페를 기획하고 제안한 세 명의 실무자를 더하면 총 33명이었다.     


당시 33명의 출자자는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조선민족대표 33명과 비견될 정도로 큰 힘이 되어주었다. 출자뿐 아니라 수천 권의 책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 새로운 공간을 청소하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까지 아낌없이 힘을 보태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마을 북카페 설립 실무에 흔쾌히 손을 보태준 두 명의 책 만드는 엄마 소모임 회원이었다.     


한 동네 주민이었던 H언니와 S언니, 그리고 나(이상 나이순).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과 기질을 가졌고, 나이도 다르고 일처리 방식도 달랐지만 작업할 수 있는 마을 카페를 만들고 싶다는 공통의 욕구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몇 년간 함께 소모임 활동을 하면서 매주 규칙적으로 만나고 전시회를 열거나 공모사업을 함께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함께 해온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정확히 업무 분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가진 역량에 따라 자연스레 일을 나누면서 머릿속에 있던 이상의 공간을 현실 세계의 공간으로 만들어나갔다.


몸은 굼뜨지만 컴퓨터 작업에 익숙한 내가 마을 카페 설립 홍보와 자료 수집, 재정을 담당했고, 차를 가진 H언니가 주로 탐방 및 물품 구매를 위한 방문이나 운반 업무를 맡았다. 뜨개질부터 목공까지 못하는 게 없는 S언니가 테이블이나 간판 만들기 등 셀프 공사와 관련한 부분을 주도하는 식이었다.       


테이블 상판으로 쓸 자작나무 합판을 사포질 한 것도 초기 실무자였던 세 명이었다.


각자 가진 열정과 재능을 공간 설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함께 모으고 집중하던 그때의 에너지는 분명 다른 출자자들의 공감과 동참을 이끌어내게 할 만큼 뜨거웠다. 그렇게 3명의 에너지가 나머지 서른 명을 불러 모은 경험은 내게 두 가지 교훈을 주었다.    

 

첫째, 마을살이는 자기가 신나서 해야 된다는 것.

둘째, 시작이 반이라지만 그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전부는 사람이라는 것.     


길지 않은 7년이라는 마을카페의 역사 속에 공간을 알뜰살뜰 보살펴온 것도 모두 사람들이었음은 물론이다.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커피를 내리고, 컵을 닦고, 쓰레기를 버리고, 밀린 공과금을 마련하는 일까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품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준 이들 덕분에 이 공간이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nolda/58 

https://brunch.co.kr/@nolda/59

https://brunch.co.kr/@nolda/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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