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을 얻은 지 반년쯤 되었을 때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민원 사이트에 들어가 주민등록등본 교부를 신청했다. 곧바로 서류가 발급되었다. 출력을 하기 위해 파일을 열었는데 서류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이름 앞에 놓인 세 글자 때문이었다.
세대주(世帶主)
처음 전입신고를 할 때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전세로 이사를 다닐 때마다 으레 하던 거였으니까. 작업실이상가가 아닌 주택이기 때문에 보증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했을 뿐이다. 그러고선 한참을 잊고 지냈더랬다. 주민등록등본을 떼보기 전까지는 나도 까맣게 몰랐다. 내가 결혼 21년 만에 세대주가 됐다는 것을.
스물여섯에 결혼한 이후, 우리 집의 세대주는 언제나 남편이었다. 나와 아이들은 세대주인 그의 이름 아래 순서대로 표기되는 세대원이었다. 나는 세대주인 남편의 '처(妻)'였고, 아이들은 '자(子)'였다. 결혼하고 몇 년 후 호주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세대의 주인은 여전히 남편이었다. 그런데 작업실 공간을 얻으면서 세대주 '본인'이 된 것이다.
'세대주'는 현실적으로 주거를 하는 세대의 대표자 또는 관리자를 말한다. 법적으로 남편과 나는 부부이고 같은 가구에 속한다. 그러니 세대 분리가 됐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정상 주거지 등록을 따로 한 주말부부처럼 서로 다른 곳으로 주소가 등록되어 있을 뿐이다. 남편은 본가에 주소지 등록이 되어 있고, 나는 5분 거리의 작업실에 주소지 등록이 된 것이다.
본가와 작업실이 한 동네다 보니, 세대주인 남편의 명의로 된 집을 나서 5분쯤 걸어가면 내가 세대주로 있는 작업실에 도착한다. 삐걱거리는 초록색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 비밀번호를 누르면 경쾌한 '삐리릭' 소리와 함께 공간의 문이 열린다. 집보다 몇 배는 작은 현관에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면 창가로 스며드는 햇빛이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집이 아니더라도 안전하게 잠을 청할 수 있고,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한다는 평안함. 세대주가 되었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다.
헨리크 입센이 1987년에 발표한 희곡 작품『인형의 집』에는 '아늑하게 잘 꾸몄지만 수수한 거실'이 있는 헬메르 부부의 집이 등장한다. 이들에게도 주민등록등본이 있었다면, 세대주인 헬메르와 세대주의 '처'인 노라, 그리고 세대주의 '자'인 세 명의 아이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헬메르는 곧 든든한 직장을 얻게 될 예정이고, 부부 모두 수입이 늘어날 것을 축하하며 맞이하는 성탄절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집의 가장인 헬메르는 노라를 사랑한다. 자신의 아내를 '사랑스러운 작은 노라', '노래하는 종달새'라고 부르며 그녀를 다정하게 대한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느라 돈을 쓰는 아내를 '돈을 좋아하는 낭비꾼'이나 '군것질쟁이'라고도 칭하지만, 노라는 그런 남편의 말투에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곧 돈을 더 벌게 될 테니 이 정도는 써도 되지 않느냐고 천진난만하게 대꾸한다.
ⓒ[A Doll's House] By Otterbein University Theatre
이런 둘의 관계는, 헬메르가 중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한 노라의 과거가 드러나며 파국을 맞는다. 헬메르는 노라가 자신의 평판에 흠을 내었다고 분개해하며 노라를 가혹하게 비난한다. 남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 일을 비밀에 부치고 오랫동안 돈을 절약하며 모아 왔던 노라는 더 이상 행복은 없을 테니 숨 죽이고 집에 있으라는 남편의 으름장에 자신의 결혼생활이 무엇이었는지를 그제야 깨닫는다. 사건이 해결된 뒤 헬메르는 자신이 ‘힘없고 무력한 존재’인 아내를 진심으로 ‘용서’했으니 다시 자신에게 기대도 된다고 말하지만, 노라는 이 과정에서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남편이 사랑한 것은 젊고 아름답고 순종적인 아내로서의 모습뿐이었다는 걸. 그녀는 진정한 자기 이해를 위한 독립을 선언하며 결혼 후 8년간 살았던 집을 떠난다.
남편과의 언쟁 끝에 집에 아이들을 두고 나간 노라의 선택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부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극장에서 원작의 결말을 따르지 않은 수많은 수정작들이 공연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헤르만의 만류로 아이들 방 앞에 주저앉는 원작자 입센의 수정 버전과 부부의 화해로 노라가 가출을 포기하는 버전, 노라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버전까지. 사람들이 분노를 누르고 공연을 관람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극장들이 연극의 결말을 바꾸었다.
그 후로도 『인형의 집』은 수많은 속편을 낳았다.
<노라는 어떻게 집에 들어왔나>(1881, M.J 부게)
<노라의 귀환>(1890, 에드나 체니)
<인형의 집은 수리됐다>(1891, 엘레아노르 마르크스)
제목만 보아도 노라가 가출 후 마음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왔음을 암시하는 스토리임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의 모성은 중요한 덕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머니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을 아름답게 그리는 소설과 에세이, 드라마, 영화들은 지금도 모성 신화를 꾸준히 재생산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결말을 1880년대에 내놓았으니 반발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여성이 자녀를 낳아 돌보면서 미래의 노동인구를 기르는 것, 일하고 돌아온 남편이 집에서의 휴식을 통해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도록 살림을 책임지는 것은 오랫동안 사회가 여성들에게 부과해 온 의무이자 역할이었다. 이것을 거부하거나 잘 해내지 못하면 모성이 부족한 여성으로 비난받거나, 여성 자신조차 모성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조선시대 여류 시인으로서 자식을 잘 키운 신사임당은 화폐에 새겨질 수 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은 허난설헌과 결혼하지 않은 기녀인 황진이는 본받아야 할 여성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숭고한 모성이라는 신화가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재현되고 강화되어 왔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입센의 작품 속 주인공 '노라'의 선택은 고요한 호수에 핵폭탄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십수 년 전, 미혼이었던 친구가 선물한 『인형의 집』은 내 마음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남편과 결혼한 것일까. 자신을 믿으라던 남편의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지금 우리 부부의 관계는 수평적인 걸까. 아이들을 더 사랑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은 진짜 나의 감정일까. 지금 머물고 있는 집을 나의 안식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머릿속에 뒤엉킨 질문들이 가시덤불처럼 몸을 옥죄는 것 같은 날들이었다.
나 역시 그럴듯한 인형놀이를 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무서운 마음으로 그렸던 그림. ⓒDrawing by 안녕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콕하고 핏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은 날 선 감정들 속에서 내린 한 가지 결론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이들을 집에 두고 나가지는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노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쳐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엄마품이 필요한 아이들을 두고서. 정말 내가 집을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거나 그런 날이 온다면, 당연히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들을 한 편의 희곡으로 쓴다면 <안녕은 어떻게 집에 눌러앉았나?>쯤 될 것이다.
두 해 전. 나는 새로운 결심을 했었다. 이제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가겠다는. 모성 신화의 비수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준비된 가출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결심이 지금의 공간으로 나를 이끌었고, 세대 분리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언젠가다시 남편의 세대원으로 복귀하는 새로운 시나리오('안녕의 귀환')를 쓸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계약은 올해 가을까지이니, 아직 내게는 8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다. 작업실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 전에, 이 공간의 관리자로서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는 편이 더 주인다운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