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머니의 삼 남매 중 두 아들, 혈연적으로 나에게 오빠가 된다.
두 사람 역시 나의 인생에서 지워질 수 없는 가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나 추억 등은 언니에 비해 거의 부재하거나 희미하다.
언니는 딸이기도 하고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충분히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어머니를 이해하거나 혹은 자신보다 측은하게 여기거나... 하는 식으로 현실적으로 적응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 뒤 비로소 어머니와 새로운 여동생들을 자신의 넓은 의미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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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취학 전후 무렵일 것으로 추측하는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억의 편린이 남아있다.
어느 해였을까...
그 어느 새해 즈음, 어머니가 나를 통해 카드 혹은 연하장을 쓰게 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70년대 초에 나온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멋진 입체형 카드였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접혀있는 카드의 날개 한쪽을 열면 그 안에 납작 엎드려있던 예쁜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며 고운 그림이 펼쳐지는 형태였다.
어린아이에게 틀림없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었을 그 카드를, 어머니 곁에서 만지작거리던 아득하고 희미한 동영상의 분절된 한 장면은 지금까지도 가끔씩 오래된 기억의 서랍 속에서 한 번씩 제 스스로 재현되곤 한다.
그 고운 여자아이가 있는 입체 그림 아래, 내 어리고 서투른 글씨로 ‘새해 복 많이 받으새요’라고 쓰여 있는 것을 훗날, 만나게 되었던 언니가 보여주던 것까지도 떠오른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자신의 무거운 죄책감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한번 떠날 때 버리고 나온 자식들임에도, 영원히 잊고 살거나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보낸 적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가족이 서울로 이주한 이후, 나의 삶 속에 새로 존재하게 된 세명의 오누이들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두 오빠들은 그야말로 드문드문 한 번씩 등장할 뿐이다.
어느 날 문득,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만나게 되었을 때의 순간에 대해서도 어떤 이유에선지, 어쩌면 너무나 낯설어서였는지 특별한 기억의 단초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그냥 어느 날부터 그들이 내 주위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사실일 뿐이었다. 또, 어쩌다 한 번씩 보게 되면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는 기억만이 남아 있다.
언니와는 다른 느낌으로, 불편한 생각이 나를 침범하는 것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런 나를 용케 간파하신 어머니는 나를 나무랐다.
언니, 오빠들과 잘 지내봐라...
사춘기였을 나는 그런 어머니의 요구조차 불편했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거부감을 갖지는 않으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기에, 어린 나로서는 다만 복잡하게 느껴지는 가족관계를 받아들이기가 힘겨운 것만은 틀림없었다.
서로 왕래하며 지내게 된 뒤, 가끔씩 집으로 오빠들이 찾아오기도 했었는데, 후에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그들을 보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에게도 두 명의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 자신도 가정을 버리고 떠나왔으나 본인의 자식들은 만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한편으로는 내심 괴로웠거나 속상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 나는 오빠들이 정확히 몇 살인지, 나와 각각 몇 살 차이가 나는지도 모르고 살아오고 있었다. 언니와는 12~3년 정도 차이가 나니까 그 사이 어디쯤 오빠들이 위치하겠지만, 오빠들에 대해 아무것도 심지어 나이조차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때 나는 놀라웠다.
그럼에도 나는 알게 모르게 그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거인'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로, 어느 날부터인가 언니와 오빠들이 등장하고,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존재는 알겠는데 그 사실을 내 것으로 수용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알수록 복잡해지는 내 가족관계가 부끄럽고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부모님 두 사람이 동거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연을, 어느 날 어머니가 울면서 내게 처음으로 털어놓을 때의 혼란과 충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도 내가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고 담담해져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가족관계는 아주 오랫동안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 같았고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수렁 같았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라는 책이 힌트를 주었듯,
나는 그러한 진실들을 알아차리기도 이미 오래전, 슬픔과 죄의식과 불안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몸에 새기고 태어났을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늘 말이 없는 아이로서, 감추어진 나만의 ‘비밀’을 알리 없는 타인들조차도 나에게서 막연한 슬픔과 우울과 그늘을 읽어내곤 하던 뜻밖의 순간들이 이제사 이해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나도 모르는 그늘을 타고난 아이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며 소극적이고 존재감도 없는 채로 자갈밭 같은 세상을 이리저리 뒤굴거리며 살아냈다. 사는 내내 대체로 사람들과 좋은 관계 맺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수록 점점 자신감 없고 자존감은 더욱 바닥인 채로 그 당시로서는 늘 이유도 모른 채, 어떤 문제 앞에서, 어떤 사람 앞에서 도망치거나 외면하거나 망설이다 머뭇거리고 멀리멀리 뒷걸음질치곤 했다.
그리고 나는, 오빠들을 이해하려 한 적이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저 불편한 존재로만 여겼고 부채의식에 시달리는 어머니로서는 애틋하고 안타까워하든지 말든지, 나는 그들과 자주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그들을 떠올릴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날마다 시끄러운 강력사건이 뉴스에 오르내릴 때면, 이를 테면, ‘어떤 강력 범죄자의 생의 이력을 보니 어머니가 어릴 때 집을 나간 뒤... 힘들고 외롭게 살던 그가 어머니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여성 혐오와 적개심으로 여성들을 해쳤다’는 보도가 쏟아질 때면 나는 부지불식간에 오빠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매우 감사하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생의 이력만으로 보자면, 그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 외면당하고 말할 수 없이 힘들게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생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오빠들은,
어쩌면 그들의 가슴속에서도 들끓었을 분노와 절망감을 타인들에게 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그토록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정신 잃지 않으려 서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한없는 미안함과 부채의식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어머니도 없이 쓸쓸한 골목을 기웃거리거나 춥고 어두운 방에서 눈칫밥을 얻어먹고 이리저리 떠돌아야 할 때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더운밥을 먹고 학교도 다니며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적당히 누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배운 것이 없으니 가진 것도 없었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너무나도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아무리 홀로 감내하려 다독이고 눌러 담아도 차오르면 터져 나오듯, 자신의 힘겨운 삶 속에서 외부로 분출되지 못한 슬픔과 좌절과 고통은 스스로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깊은 병을 갖게 했을 것이다.
큰 오빠는 어느 순간부터 깊은 우울증으로 평생을 고통받게 되었다. 그것은 본인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가 힘겹게 이룬 가정에도 고통을 주게 되므로 특히 문제가 되었다. 우울증은 대체로 알코올릭으로 이어지고 군대 시절 익혀 생계수단이 되었다는 전기기술자로서의 가장의 역할도 온전히 해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몇 년 전에는 우울증에 더해 먼저 떠난 동생에 대한 슬픔과 술로 인한 병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
끝내 그는 자신의 아들로부터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즈음, 나는 사실 그의 간이식 결정에 시큰둥했으며 심지어는 간이식을 스스로 포기하고 본인의 타이머에 남은 시간만큼만 그 자신에게 허용해야 맞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것은 그동안 그의 우울증과 알코올 문제가 어머니와 언니는 물론 그 자신의 가족들까지 몹시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결코 말도 안 되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태도였다.
나는 그에게 아무 할 말이 없어야 맞는 것 같다. 오빠들, 한없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그들이 회복되지 못할 상처에 서서히 잠식당하는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누려온 것들을 생각하면, 그때 그토록 비난하는 심정을 가졌다는 사실이 그저 한없이 미안하고 후회스러울 뿐이다.
둘째 오빠는, 이미 얘기했듯이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혼자,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이었을 법한 수년 전 어느 해, 그 자신 또한 힘겨운 삶을 헤쳐나가던 어느 날 밤 돌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 앞에서 가족은 물론 그를 아는 사람들은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이제 돌아간다', 는 인사는커녕 가족 중 누구도 그의 외로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남겨진 이들의 아픔이었다.
그가 떠난 후, 정말로 내가 오빠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있기나 한 것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존재 자체마저 불편해했다는 사실이 죄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의 죽음을 아픔 속에 떠올린다.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