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_가여운 나의 채권자

by somehow

'친생자관계 부존재 소송'은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막내 동생, 나에게는 외삼촌이 되시는,

서울 법대에 가고 판사가 되고, 세상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 변호사로 활동하시다 얼마 전 은퇴를 선언하신 그분께서 기꺼이 도와주셨다.

그러나 친생자관계 부존재 소송은 이름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다.


재판에 당사자들이 출석할 필요는 없으나, 내가 호적상 어머니의 실제 자녀가 아니며, 나를 낳은 생모는 따로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무수히 많은 증거들을 수집해야만 했다. 그것은 생모와 함께 찍은 사진들은 물론 어느 병원에서 태어났다면 그 병원의 출생 당시 기록과 주위의 증언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출생기록이 있을 병원은 이미 오래전 없어진 뒤였고, 구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나서 당시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지내며 찍은 사진들뿐이었다.

또 하나, 증인이 필요했다.


그때 외삼촌은 언니를 증인으로 삼게 하셨다.

언니가 내 소송의 증인이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어느 시점부터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때까지 살던 춘천을 떠나 서울로 가족 모두 이사를 온 뒤로 언니의 존재가 내 의식에 등장한 듯하다.

부모와 나, 동생이 함께 사는 집에 언니가 함께 거주한 적은 없는 것 같으나 그럼에도 언니는 내 분절된 기억의 중간중간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언니는 원래 자신의 어머니였던 나의 어머니가, 나와 내 동생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을뿐더러 함께 살지는 않아도 수시로 왕래하며 지내왔으므로 증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외삼촌의 말씀대로 나는, 나의 엄마를 되찾는 소송에 증인이 되어 달라고 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언니는 단호했다.

‘싫어!’

언니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실은, 뜻밖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당황했다.


어머니와 내가 한 핏줄이 틀림없으며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사실을 가장 오랫동안 보고 익히 아는 바에 대해 진술해주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려워서 그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한심하고 몰상식하며 이기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언니의 태도는 실로, 너무나 당연한 반응임에 틀림없었다.


언니는 한참 만에 잠긴 목소리로 힘들게 입을 열었는데, 그 말을 그대로 옮기기는 쉽지 않으며 대략의 사실적 내용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사실은 결국 언니 자신을 떠남으로써 비롯한 일이며, 그것은 또한 어머니가 동생들과 자신을 두고 돌아서던 바로 그 쓸쓸한 날을, 열두 살 인생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엄청난 충격과 절망의 고통을 떠올려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그 슬픔을, 그날로부터 가녀린 여자아이의 어깨에 내려앉은 생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정신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의 상처와 고통을 다시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언니 자신에게는 또다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슬픔이며 아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 통증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까짓것 ‘이 어머니가 이 딸을 낳은 게 맞다’고 확인해 주는, 그 말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쓸쓸했던 그 어린 날을 생각조차 하기도 싫다는 것이었다.


언니의 트라우마 또한 여전히 그녀 가슴에 피멍으로 남아있으며 언제든 그날을 떠올린다면,

선명한 붉은 핏물 뚝뚝 흘리는 열두 살 소녀의 고통과 함께 살아난다는 사실을 나는,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겨우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목이 메인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슬픔과 뒤늦은 안타까움,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그날의 어린 언니가, 아직도 보듬어주고 핥아주기를 바랐을 그 철없는 여자아이가 자신을 두고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느꼈을 절망감의 깊이를 나는 끝끝내 결코 충분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없이 그저, 말할 수 없이 내가, 미안했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으나 부지불식간에 나는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울 수 없는 부채의식에 시달린다.

그처럼 말로 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언니는 가슴에 묻고, 훗날 우리 가족이 서울로 옮겨왔을 때부터 다시 어머니를 만나고 나의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대하며 괜찮은 관계로 지내는 것이 절대로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그것조차도 여전히 나는 겨우 미루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언니의 힘겨운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어머니는 그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어머니야말로 자신의 큰딸과 두 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무거운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가지고 평생을 살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그토록 힘겨운 심리적 부담을 감내하면서도, 결국 충분하고도 정직한 '증인'이 되어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주민센터에 가서 가족관계 기록부를 떼어보았을 때, 마침내 어머니는 '진짜' 나의 어머니로, 내 동생의 어머니로 제자리를 찾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적어도 오십여 년이나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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