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라고는 뜨거운 마음뿐인 빈털터리 두 사람이 만나 벽돌 하나씩을 쌓았다.
자식들까지 외면하고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 고작 그것이라니....
그럼에도 어머니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새로이 직면한 현실을 감내하기 위해 다시금 노력을 시작했다.
'인생 따위 내 그럴 줄 일았다'고 말하기엔 아직도 일천한 나 따위가 감히 짐작해 보자면,
어쩌면 어머니는 그래도 행복했을지 몰랐다.
자신의 운명적 상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현실적인 장애요인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함께할 결심을 스스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을지도 몰랐다.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무슨 일인가 했던 것 같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미군부대에서도 일할 수 있었으며, 타고난 손재주와 눈썰미로 익힌 이발 기술을 밑천 삼아 한동안 이발사로도 일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딸 하나가 태어났다. 그것은 축복이었을까 불행의 씨앗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불륜의 증거.
먼 후일 나 자신 내 출생의 근원을 알아차렸을 때 처음 떠오른 단어였다.
처음부터 동정녀 마리아도 아니었을지라도, 당시의 어머니는 죄의식과 불안과 미래에 대한 근심 혹은 애타는 희망의 원죄 속에서 나를 잉태했으리라.
트라우마는 그렇게 내게로 유전되어왔음에 틀림없다.
수년 전 우연히 손에 잡혀 읽게 된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라는 책장을 읽어 넘기던 나는 마침내 알아차렸다.
이제껏 사는 동안 이해할 수 없고 도무지 풀리지 않았던, 뒤틀린 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감도는 성향과 특이성들에 대한 해답지를 흐릿하나마 찾은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며 힘겹게 세상을 헤쳐 나오는 동안 왜 내가 늘 그런 심정이었는지, 왜 그렇게 자신 없고 위축되어 있었는지. 왜 사람들은 활짝 웃으려 노력하는 내게서 슬픔과 그늘을 읽어내는지.
심지어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가장 절절하게 원하는 자신의 아이를 갖지 않고도 이토록 태연하고 무덤덤하게 혹은 홀가분하게 살고 있는지...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아주 오래된 상처에 대해, 심지어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 대로부터의 트라우마까지도 어떻게 유전되는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어도 개인적 기질의 차이에 따라 자녀들이 물려받는 트라우마의 크기와 표출 양식은 각각 다르게 발현된다고, 책은 나에게 힌트를 주었다.
훗날 회고하기로, 새로 이룬 가정에서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 수없이 노력했다고 한다.
그것은 쓸쓸한 골목길에 두고 온 어린 딸과 두 아들이 생각나서, 다시 아이를 낳는 것은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였다고. 지금처럼 피임이 보편적이고 제대로 교육되지도 않던 그 시절의 그 '노력'이란 낙태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나는 운 좋게? 혹은 운 나쁘게? 살아남아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러 번 아이를 지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4년 후에는 동생도 태어났다. 어찌할 수 없이 태어난 나를 두고 다시 동생이 잉태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더욱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극단적인 낙태 시도 전에 자연적으로 유산되기를 바라며 다양한 방법을 썼으며, 그중에는 '약'을 먹는 노력도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동생은, 그처럼 적극적이고도 애달픈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살아남았고 꿋꿋하게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원죄를 움켜쥐고 태어난 나는 당연스럽게 곧바로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이혼을 전제로 집을 떠나고 가족을 버렸을 것이다.
머지않아 이전의 가족은 정리되리라고, 정리하리라는 결심을 안고 시작한 일일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레 어머니의 경우, 그녀가 집을 떠난 후 어느 사이엔가 전남편 측의 노력으로 이혼처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보잘것없는 둥지에서 아이가 태어나도록 아버지의 호적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자식이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머니에 의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즈음에야 밝혀졌다.
일곱 살, 여덟 살이 되도록 취학통지서가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어찌어찌 알아보니 그때까지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당연히 출생신고가 되어있으리라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제서야 부모는 부랴부랴 여덟 살이 되어서야 더 이상 미룰 수없어 마지못한 듯, 출생신고를 하고 곧바로 취학통지서를 받아 1학년에 입학시켰다.
어머니 자신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음에도, 흔쾌하게 얻은 자식은 아닐지라도, 때가 됐으니 학교에 보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출생기록조차도 없이 하마터면 무적자로 살아갈 뻔했던 나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이 나는 지금도 감사하다. 조금만 무심했더라면, 조금 더 새로 난 자식에게 애착이 없었더라면?
그러니까, 아버지는 여전히 법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과거에서 놓여나지 못한 상태로, 한편에서 세 아이와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본부인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아서? 혹은, 곧 정리되리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찌 되었든 그에 관한 아버지의 진의를 나는 끝내 알아낼 수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머니의 법적인 남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평생 ‘동거인’으로서만 존재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그것들은 나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의 본부인은 끝끝내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자신 세 아이와 평생을 분노와 고통 속에 살더라도 이혼에 합의해 주지 않음으로써, '결코 너도 편히 살 수는 없게 하겠다'는 결의를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지난 시절, 아버지의 복잡한 법적 지위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나는 그런 본부인이 원망스러웠다.
주민등록부에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 모가 아닌 동거인으로 등재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나를 학교에 보내기 위한 출생신고도 그러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라, 아버지와 그 본부인의 호적에 넷째로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훗날, 나는 나를 낳은 어머니와 호적상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며 나를 낳은 어머니를 진짜 어머니로 인정해달라는 ‘친생자관계 부존재 소송’을 제기해야만 했다.
이 소송을 시작한 것도 지금으로부터 10년 이내였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 일을 한 것은 미국에서 결혼하여 사는 동생이 어머니를 초청하는 경우가 생길 것에 대비하여, 호적상 친어머니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온 뒤였다.
그전까지,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어머니가 아버지의 평생 동거인이라는 슬픈 지위에 머무르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나와 동생이 생모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녀로 기록되어있다는 사실에는 그제까지도 무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동생의 결혼과 해외 거주를 계기로 바로잡기로 마음먹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