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들이 갑자기
2015년 7월 서른 다섯의 나는 서른여섯의그를 만났다. 2016년 5월 결혼을 했다. 2016년 8월 임신을 했다. 2015년 6월까지 나는 독신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2017년 5월의 나는 출산예정이다. 내 나이 37살이다.
반드시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던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도 했다. 그리고 아팠다. 그런 과정들에 지쳤다. 많은 사람들과 비슷한 수순이었다. 나는 감정이 깊었다. 사랑과 사람들은 나에게 깊은 행복과 절망을 동시에 주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상대에게 바라는것이 많았다. 아니라고 했지만 그랬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힘들어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나 만나서 결혼할 바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게임하는 사람도 싫었다. 잠이 많은 사람도 싫었다. 게으른 사람도 싫었다. 과하게 나서는 사람도 싫었다. 참 싫은게 많은 사람이었다. 정확하게는 가진거 대비 바라는게 많은 사람이었다. 요즘 말하는 눈만 높은 사람이다. 물론 나도 나쁘지는 않다. 내 기준에서는 내가 최고이지만 그걸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나도 모르게 남자들은 그저 어리고 세지않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었던것 같다. 나는 어리지않고 확.실.히. 센 여자였다.
친구의 추천으로 나갔던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참 착하게 생겼다 하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그 뿐이었다. 그러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둘이 남았다. 나는 남자들은 한심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속으로 늘 '왜 저래'를 생각하곤 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않았다. 오천원짜리 안주 하나를 시켰는데 술값이 오만원이 넘게 나왔다. 새벽 4시였다. 나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우리는 편의점을 찾았다. 편의점 앞의 파란색 플라스틱 파라솔에 앉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녹차 아이스크림이 달콤했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나는 술에 취하면 손을 잡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술에 취해있지 않았다. 그런데 서른여섯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이상했다. 누가 손을 잡았는지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핸드폰에서 성시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벽의 여름바람이 시원했다.
전면의 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눈이 떠졌다. 시계를 봤다. 새벽 6시였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 뒤척였다. 결국 서른여섯이 잠에서 깼다. “잠이 안와요?” “네 잠이 안와요” “낯선 곳이라 불편한가보다 산책 갈까?” “그래도 되요?” “당연하지요” 서른여섯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했지만 기뻤다. 여행지에서 새벽 산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양치와 세수를 했다. 모자를 썼다. 늦여름이지만 새벽바람이 쌀쌀했다. 월정리 해변은 아담했다. 밝은 빛의 모래사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꽃들이 피어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흰 꽃 향이 났다. 이름을 모르는 꽃은 연보라색이었다. 바다 옆의 노지에 피어있었다. 나는 잔뜩 피어있는 꽃들을 좋아했다. 작은 꽃들이 모여 있을 때의 소담함과 화려함이 좋았다. 소금기가 있는 바람에도 생생한 것이 신기했다. 향이 길게 우리를 따라왔다. 월정리 해변 길에는 곳곳에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바닷바람에 색이 바라진 의자들이었다. 작은 의자에 앉았다. 고운 모래들이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멀리 바다 빛이 아름다웠다. 나는 꽃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바다를 거닐고 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서른여섯은 웃었다. 파도가 다녀간 곳에 부셔지다 남은 조개들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남겨놓은 발자국도 우리를 향해 있었다.
20대 중반 제주도에 왔었다. 제주도는 그때와 많이 달랐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달랐다. 서른여섯을 만난 지 한 달 째였다. “우리 제주도 갈래요?” “좋아요” 내가 쓰던 책의 마지막 여행지를 제주도로 정해놓았다. 나의 서른다섯을 정리하는 여행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함께 제주도에 있었다. 이제까지 다녀온 여행을 정리하는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 나에겐 고되었던 내 서른다섯의 방황도 적어내고 싶었다. 방황을 적어내면 아직 찾지 못한 나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생각이 많다고 했다. 예민하다고 말했다. 알고 있었다. 나의 기질이었다. 남들보다 진지하고 심각했다. 내가 만들어놓은 내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겁이 많다. 사람을 경계한다. 기대도 없다. 실망하는 게 싫어서였다.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내 마지막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눈이 부시다면 햇빛을 가려주는 손이 없어질 수도 있다. 수줍고 설레는 지금이 아픈 기억이 될 수 있다. 지금의 두근거림이 잔잔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인생에 이 사랑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게 지금이다. 나는 지금 그와 제주도의 해변을 걷는다. 바람이 가을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