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사가 되고싶다 Dec 26. 2020

[4] 며느라기에 갇힌 여자들, 메뚜기 떼 같은 남자들

남편이 쓰는 '며느라기와 현실' Ep4.


명절마다 여자들은 제사 음식 준비와 함께 스무 명이 넘는 친척들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고, 물론 설거지까지 책임져야 했다.


*친척: 나에게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지만 아내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


명절날 아침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외부에서 먼 친척분들(아내에게는 조금 더 먼 타인)이 10명 정도 추가로 방문한다. 30분 남짓한 제사가 끝나면 부엌에서는 손님들을 포함한 남자들의 아침식사를 챙긴다.

     

'남편이 쓰는 '며느라기와 현실' Ep3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elephantasy/112


제사와 아침 식사를 마치면 남자들은 모두 이동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자들은 모두 차를 타고 다른 친척 댁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떠나는데, 나는 그 모습이 꼭 메뚜기 떼 같다고 느낀다.


우리는 마치 메뚜기 떼 같았다.



메뚜기 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나를 포함한 남자들) 떠난 자리에는 먹고 남은 음식과 설거지 거리가 수북하게 쌓여있다는 점이었다.


그 메뚜기 떼는 또 다른 집으로 향했고, 그 다른 집에서도 그들만의 며느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큰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남자들이 다음 장소로 떠날 때까지 여자들은 부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자들이 떠나면 그제야 남은 음식들을 한데 모아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또 누군가는 설거지를 해야 했다. 물론 설거지 담당이 아닌 사람들 역시 각자의 역할이 있다.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릴 때 즈음 제사를 마친 남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대략 오전 11시 반에서 12시 사이.


그리고 반복되는 점식 식사 준비와 설거지..  


아주 전형적인 우리 집안의 명절날 모습이었다.

(과거형으로 적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 집안의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하에 암묵적으로 강요된 며느라기는,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 큰집에 방문한 내 아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인은 누구십니까아

아는 사람이라곤 남편과 시부모 밖에 없는 낯선 곳. 처음 보는 시댁 친척들과 일면 일식도 없는 남편 조상님들의 제사 준비. 온종일 부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지들이 있지만 그들은 서로 이름이 없다.



ㅇㅇ엄마, 형님, 큰 형님, 동서, ㅇㅇ이네.. 그게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자 이름이었다. 확실한 건, 부엌을 경계로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성씨를 가졌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성씨는 제각각이라는 점.

  



결혼 전에는 알면서도 몰랐던 현실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내가 뭘 어떻게 바꿔야 할지, 바꿀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변화를 원하는 내 생각이 옳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이 이 집안의 문화에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내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지만, 과연 내가, 8남매 중 막내인 우리 아버지의 막내아들인 내가 그 문화를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랬다.

그 문화를 바꾸고 싶었지만 내 손으로 우리 집안의 분위기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명절날 부엌에서 아내를 구출해야 했지만 현실의 벽을 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전략이 필요했지만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몰랐다. 누구의 마음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내가 미운털이 박히는 상황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갔고

아내는 또 한 번의 며느라기를 겪어야만 했다.


https://tv.kakao.com/v/414807985

매거진의 이전글 [3] 친척 형의 이상한 행동 (feat.며느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