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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Mar 21. 2022

쾌락을 돈 주고 샀습니다.

나의 퇴사 이야기(2)

내 상사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이미 예상한 태도였다. 막상 마주 앉으니 퇴사 이야기가 쉽사리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비겁하게 말을 빙빙 돌리다가 결국 이실직고하듯 퇴사를 통보했다. 상사는 내게 다른 제안을 제시했다. '휴직'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는 무슨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어떻게 하고 싶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절대 나를 다그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저, 도무지 내일부터 못 나오겠어요.
저는 지금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인 거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상사에게 그동안 8개월간의 이야기를 긴 시간으로 공들여서 털어냈다. 내가 앓고 있는 병과 현재 나의 상태. 내가 입사 초부터 함께 해왔던 상사임에도 이런 대화는 단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그분이 어려웠다. 나는 MZ세대였고, 그분은 X세대였다. 나는 20대였고, 그분은 40대였다. 나는 사회를 나와 40대의 어른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에게 X세대란 부모뻘이라고 하기에는 젊고, 언니 오빠뻘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왜 그렇게 거리를 뒀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코로나 시국에 입사하여 코로나가 사라지지 않은 시기에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하자 내 몸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몸살을 한 차례 앓았다. 내가 다닌 직장 중 가장 길게 다닌 곳이었기에 그 후유증은 더 심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도 며칠간은 필요 이상의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회사를 다니기 전과 후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중 가장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는 바로, 씀씀이가 헤퍼진 것이다.


스마트폰과 신용카드 그리고 30초라는 시간. 이 세 가지의 조건만 충족된다면 나는 쇼핑이라는 행위로 찰나의 쾌락을 즐길 수 있었다. 방금까지 듣고 있던 모든 폭언을 잠시나마 망각하는 즉각적인 효과가 있었다. 나는 회사를 다니며 이 방법을 자주 이용했다. 일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도, 퇴근할 때도 틈틈이 쇼핑 사이트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을 샀다. 월 30~50만 원가량의 카드빛이 순식간에 200~300만 원으로 늘어났다.


나의 월급은 내 또래 나이의 표준 월급 200만 원에 불과했다. 내 또래 친구들이 주식투자에 몰두할 때 나는 미친 듯이 물건을 샀다. 나의 소비에는 철저하게 나의 '욕구'만이 반영이 되어있었다. 택배가 오면 풀어보지도 않았다. 상자들은 삽시간에 내 방을 점령했다. 풀지 않고 산처럼 쌓여있는 상자들을 보며 나는 이유모를 안도감을 느꼈었다. 나는 이 또한 취미라고 정의를 내렸다.


매달 월급은 말 그대로 통장을 스쳤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여행을 가고, PT 하는 사람들처럼 나의 소비도 그런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자부했었다.


나는 퇴사를 결심하고 나서야 그 상자들을 풀어헤쳤다. 그곳에는 물건이 아니라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자 꾸러미를 풀면 풀수록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산 것들 중에 나를 위해 산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단 한 가지도.


여전히 카드빛은 남아있다. 나는 가지고 있던 신용카드를 줄이고 줄여서 딱 1개만 남겨두었다. 내가 퇴사 후에 얻은 건 경험, 커리어, 우울증과 수면장애 그리고 백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카드 빛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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