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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태형 Mar 16. 2020

삶은 즐거운 것인가? 슬픈 것인가?

삶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인가? 슬픈 것인가? 

한동안 이 질문을 중요하게 여긴 적이 있다. 근본적으로 슬픈 것이라면 현재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즐거운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현재의 문제점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나에겐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쟁점이었고 그만큼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상황에 따라 좀 더 이로운 방향으로 해석하는 게 내 나름의 대처가 되곤 했다. 



한동안 삶이 괴로웠다. 현실이 고통스럽고 무엇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매일이 힘들었으니 나는 당장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의존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셨고 다음 날엔 숙취에 괴로웠다. 당시 내 삶은 슬프고 괴로운 것이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슬픈 운명이다. 나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고 그 생각에 버틸 수 있었다. 

또 다른 한때는 즐거운 일로 가득했다. 슬픈 순간이 지나가자 하루가 즐겁고 회사에서도 열정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미소를 지었으니, 그들도 나를 편하게 대했다. 그때의 인생은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간간이 맞는 슬픈 감정도 기쁨에 덮여 순식간에 잊히던 시기였다. 



요즘은 어떤가? 최근 들어 나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신경 쓰느라 에너지를 낭비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다 저거다,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는 이분적인 논리로 모든 걸 설명하려 든 게 나를 힘들게 했다. 특히 이런 태도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나에게 득이 되나, 실이 되나를 따지게 해 깊은 관계를 방해하고 본인에게는 답이 없는 걸 구하느라 스스로 무너지는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게 얼마나 많은가? 돌이켜보면 모든 가치는 내 경험과 기준을 허물고 기본적으로 수용의 자세를 견지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틀리면 어떻고, 맞으면 어떤가. 조건화하지 않는 인식의 과정을 거치면 나는 좀 더 세상을 포용력 있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기대나 감정이 배제된 중립 된 상태에서의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이것이 도가의 중용(中庸)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이다. 요즘 나는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되도록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성경에서도 '판단하지 말라!'(롬 14:10~14)고 하지 않나. 기독교의 절대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가를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술을 마시는 이유도 현실의 고통을 잊거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 실제 고통은 술을 마신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고통은 내면에서 온전히 소화시킬 수 있을 때 극복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잠시 잊는다고 다음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나? 고통을 끌어안고 수용할 수 있을 때 현실적 타결점이 나올 수 있다. 이로써 나는 너무 쉬운 방법이 도리어 나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현대인들은 고민 없는 삶, 편한 삶, 즐거운 삶만을 쫓으며 이것이 인생의 최고 가치 인양 여기고 있지만, 정작 가장 필요한 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이것을 깨달을 때 진정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은 떨쳐내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란 걸 나는 오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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