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숙여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아직과 이미 사이> 박노해
시인은 ‘이미'에서 희망을 보라고 했지만, 우린 ‘이미’ 마흔이 되었지만 ‘아직’ 이룬 게 많지 않다. 마흔이 힘든 이유는 ‘이미’ 지나간 자신의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과거가 초라할수록 다가올 미래가 더 두렵게 다가온다.
“회사를 나가면 뭐 먹고살까?”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항상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늘 바쁘지만, 이 지독한 분주함 속에서 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까지 나만의 세계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하며 깨달은 게 있다.
인생은 무엇을 이뤘다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일까? ‘이미’ 이뤘다면 성공한 인생이고, ‘아직’ 이루지 못했다면 실패한 삶인가? 아직과 이미 사이에는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특히 마흔은 이 두 단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시기로 여겨진다. 어쩌면 ‘이미’ 지나간 과거를 인정하고, ‘아직’ 남아 있는 가능성을 믿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마흔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직’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러니 '이미' 이루지 못한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아직' 이뤄갈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자. 마흔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체게바라의 말처럼, “리얼리스트가 되어 가슴속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이미 늦은 때란 없다. 단지 아직 우리의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