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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는 묘비명을 쓰자

by 엄태형 Feb 25. 2025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해는 졌고 언덕들은 희미하다. 내 마음의 산맥에는 아직 산꼭대기에 빛이 조금 남았지만

성스러운 밤이 감돌고 있으니, 밤은 대지로부터 솟아 나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구원이 없음을 안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지만, 숨을 거두어야 하리라.”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





오래전, 어떤 기회로 묘비명을 준비할 기회가 있었다. 참여한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는데, 당시 나는 난생처음 접하는 경험에 적잖게 당황했다. “내가 죽은 뒤, 내 삶을 어떻게 한 문장으로 남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동시에 낯설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끝을 상상하지 않는다.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지만, 언젠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회피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묘비명을 고민하면서, 나는 내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남은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현재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했다. 처음엔 거북하게 느껴졌던 묘비명 쓰는 행위가 삶에 관한 질문들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뒤로 몇 번 묘비명을 고쳐 썼다. 그리고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묘비명을 알게 됐다. 내게 지침이 되고, 신선하게 다가왔던 묘비명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금도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김수환 추기경은 성경구절인 시편 23편 1절을 인용해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를 남기셨고, <토지>를 쓴 우리나라 대표 문인 박경리 작가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라고 하시며 우리 곁을 떠났으며, 남은 생을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 헌신하다 간 슈바이처 박사는 “만약 식인종이 나를 잡으면 나는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우리는 슈바이처 박사를 먹었어. 그는 끝까지 맛있었어. 그리고 끝도 나쁘지 않았어”는 멋진 묘비명을 남겼다. 그리고 조금 익살스러운 묘비명을 남긴 이들도 있는데,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를, 생전 많은 기행으로 눈길을 끌었던 중광 스님은 “괜히 왔다 간다”를 묘비명으로 썼다.


이들의 묘비명을 보면 그 사람의 살아생전 삶을 조망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건 그 사람이 ‘잘살았냐’, ‘못살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냐’의 문제다. 나는 그날 이후로 깨닫게 됐다. 묘비명은 단순한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이정표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묘비명에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엄숙한 질문 앞에 자신을 놓고 하는 자기반성이며, 지고지순한 삶의 의지다.


그래서 묘비명은 죽음 직전에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팔팔할 때 쓰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삶이 생생하게 살아나게 만드는 효과 좋은 충격요법이 바로 묘비명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평생 죽음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한 말이 좋은 지침이 된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끝으로 무덤까지 안고 갈 내 묘비명을 공개한다.

“나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았다. 나는 현실의 부적응자였다. 나는 그런 내가 좋았다.”

(*묘비명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크레타섬에 잠들어 있는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마흔이여, 당신의 묘비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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