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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룡 Jul 15. 2022

몰래 내린 수화기

사무실에 쥐구멍이 있었다면.


부푼 꿈을 안고 사령장을 받는 날이 왔다.

 특이하게도 우리 회사는 입사하는 날 어느 부서에서 일하게 될지 알려준다. 취준생 시절, 나름 회계 지식이 풍부하다는 근자감으로 재무/회계 직무만 골라내어 원서를 넣었던 터라, 회계팀 내지는 자금팀에서 일하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자 담당'


태어나서 처음 보는 단어였다. 앞으로 일해야 할 부서인데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다니 정말 꼬였구나 싶었다. 심지어 당시 대표이사님이 사령장을 직접 읽어주셨는데 '레저 담당'으로 발음하셔서 고개를 갸웃거린 기억도 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내자 담당은 구매팀에 속한 부서로 제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원/부자재를 국내에서 조달해오는 일을 하는 곳이다. 너무 예상 밖의 일이었으나 어쩌겠는가, 일단 해보는 수밖에.


구매팀에는 '내자 담당'외에도 해외에서 원자재를 조달하는'외자담당'이라는 부서도 있다. 통화소리도 들릴만큼 가까운 자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거기 선배들은 종종 유창한 영어를 사용해가며 통화를 하곤 했다. 막힘 없이 전화로 샬라 샬라 하는 그들을 보며 꽤 멋있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론 그 부서로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었다. 이력서에 적힌 토익 점수는 900점을 웃돌았으나, 외국인과 마주하는 상황이 오면 눈도 못 마주치고 마음속으로 100M는 도망가버리는 '나'였기 때문이다.

팀 막내의 중요한 일 중 하나로 '전화 당겨 받기'가 있다. 그 일의 주요 포인트는 바쁜 신 선배님들이 벨소리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도록 전화벨 소리가 두 번 울리기 전에 빠르고 정확하게 수화기를 집어 드는 것이다.

가끔은 너무 반사적으로 수화기에 손이 가다 보니, 자리에 있는 선배의 전화를 당겨 받는 적도 있었다.

(^^;)

'따르르르릉... 따르르...' 두 번째 벨이 이어지려던 찰나 고민도 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말룡 : '안녕하십니까! 구매팀 말룡입니다.'

상대방 : 'Hello? This is....I'm calling from...(기억이 나지 않는다.)


맙소사! 멘붕이 왔다. 전화를 받고 있는 나를 모두가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다들 업무에 집중하느라 막내의 통화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우선, 다행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아니, 말을 이어가긴 할 수 있을까? 그냥 끊어 버릴까? 중요한 전화면?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수 십 가지 질문을 쏟아냈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 결정을 해야 했다.


'딸깍'


수화기를 내렸다. 내려가는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고, 잘못 걸린 전화 인양 행동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후 검은 모니터 화면에 비친 한심한 나를 발견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걱정이 앞섰다. 전화도 제대로 못 당겨 받는 내가 과연 회사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로부터 4년 뒤, 나는 외자담당으로 발령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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