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파파고
대리 2년 차에 첫 부서이동을 했다. 발령받은 부서는 외자담당으로 해외 자재 구매를 담당하는 곳이다. 구매팀 안에서 작은 이동이었지만, 나에게는 꽤나 큰 변화였다. 무언가를 사는(buy) 일은 같았지만, 어디서(국내/해외) 사 오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막 보는 게 불편해서 미드도 안 챙겨보고, 팝송은 말도 안 되는 언어로 흥얼거리는 나는 그 흔한 해외직구 경험조차 없었다. 그렇다. 영어에 자신이 1도 없는 그런 사람이다.
회사는 그런 나에게 외국인들과 소통해서 제품의 원부자재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하는 역할을 주었다.
비즈니스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니... 퇴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자꾸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고 치기 전에 도망치자는 생각도 들었다.
선택지는 3가지다.
1. 퇴사 2. 못한다고 버티기 3. 부딪혀보기
아무 대안 없이 퇴사하는 것은 더욱 불안했다.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까지껏 해보자.
참고로 우리 회사는 식품제조회사로 구매하는 원재료 중에 과일농축액 따위가 꽤나 비중이 있다.
그중 태국에서 알로에베라겔을 수입해 오는 게 첫 미션이었다. 일의 내용은 간단하다.
1. 올해 작황과 견적 문의
2. 구매할 수량 결정
3. 가격 협의
4. 입고 일정 조율
5. 발주
첫 단계부터 차근차근 검토해서 1~2주 안에만 결정하면 끝나는 일이다.
당시 사수는 내게 태국 회사의 담당자분은 일본 사람이라 영어가 능숙하지 않다고 했다.(나만 하겠냐..) 모든 업무는 이메일을 통해서 진행했다.
자, 이제 올해 작황이랑 가격을 문의해보자.
Dear, 000.!
.........? 음.. 안 되겠다.
급하게 파파고를 켰다. 한 문장씩 작성해서 번역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영어 어순이 이상하면 한글을 다시 수정해서 번역기에 옮겨 적었다. 그 와중에 주변에 누군가 다가오면 번역기 사용하는 모습을 들킬까 화면을 전환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한 사무실에서 혼자만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1시간. 첫 이메일을 작성하는데 1시간이 걸렸다.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답장조차 안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됐건, 2번째 스텝으로 나가야 했다.
자.. 발주까지 끝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