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iel Oct 05. 2019

고군분투 이사하기

도대체 맹모삼천지교는 어떻게 한 건가

이사를 해야겠다!

6평 남짓한 원룸이 정말이지 비좁게만 느껴졌다. 셀프 도배로 애정이 가득했던 벽은 3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담은 듯 지저분했다. 무엇보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주는 스트레스가 이사 결심을 더 굳히게 만들었다. 수년간 1호선 통학으로 '어르신들의 선 넘기'에는 꽤 무감각해졌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집주인 할아버지의 행태는 참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사를 가겠노라 전화를 드리며 들은 얘기가 가관이었다. 1) 이쁜 네가 이사를 간다니 아저씨 마음이 섭섭하다. 2) 이사 가기 전에 아저씨랑 사진 한 장 찍어줬으면 좋겠다. 3) 3년 동안 애인 데려오는 걸 못 봤는데 니 나이쯤 되면 애인도 사귀고 그래야 한다 등등.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아쉬운 처지의 나로서는 화도 못 내고 허허 웃으면서 받아주다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비로소 씩씩거렸다. 나중에 이 이야길 듣고 분개한 오빠와 새언니가 집주인에 전화를 걸어 한 소리 한 덕분에 사과를 받긴 했지만 말이다.


D-45 이사 갈 집 알아보기

돌아가서 살고 있던 집의 계약기간은 본디 2년이었던지라 현재는 묵시적 계약 갱신인 상황이었다. 고로 법적으로는 계약 해지 통보 3개월 후에는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고,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월세를 부담하거나 중개수수료를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경우 8월 중순에 통보했으므로 11월 중순엔 받을 수 있었는데 다행히도 집주인은 그 전에도 이사를 가게 되면 맞춰서 보증금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10월 중순쯤 이사 가면 딱이겠지 싶었는데 대학가라는 특성의 신촌/홍대 일대는 여름방학이 매물도 거래도 많은 이사 성수기라 마음이 급해졌다. 내가 원하는 조건을 우선순위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마포구 혹은 서대문구
2. 보증금 예산 내로 이사가 가능한 집
3. 전세자금 대출(전입신고 등등)이 가능한 집
4. 보안이 좋고 집주인의 터치가 전혀 없는 집
5. 6평보다는 넓을 집

모두 맞추는 게 쉽지 않겠지만 어느 하나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아직 준공도 되지 않은, 공사가 한창인 신축 오피스텔부터 로비에 가야금이 걸려있는 AIR B&Bst 원룸까지. 이 조건들을 충족하는 집을 찾기 위해 몇 주간 발품을 팔았는데 슬프게도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놓친 적도 있었다. 무려 스타일러가 옵션인 복층 오피스텔.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과 금전의 한계가 느껴지니까 그냥 다시 월세살이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가 다시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당장 쫓겨나는 상황도 아니고 안되면 앞에 말한 신축 오피스텔 준공되면 들어가자! 그까짓 새집증후군, 피톤치드로 다 해결하지 뭐!'

    날씨가 좀 서늘해지면 다시 발품을 팔 요량이었는데 갑자기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신축 오피스텔이 한참 공사 중이라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이제 저층은 어느 정도 마무리돼서 구경하러 오라고. 한껏 기대하며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기대에 못 미쳤다. 복층 구조의 원룸이었는데 1층은 너무 비좁았고 2층의 층고가 높지 않아 키가 작은 나도 움직이기 불편했다. 신축답게 여러 가지의 호화찬란한 옵션이 많았으나 전체적으로 답답하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무엇보다 부동산에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는 구체적인 층수와 방향을 알아야 계약을 진행할 텐데, 먼저 계약을 진행할지 여부를 알려줘야 층수와 방향을 맞춰준단다. 짜증 나긴 했지만 알겠으니 층수와 방향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아직 준공도 좀 남았으니 정해진 예산 내에 가장 높은 층수와 좋은 방향의 집이면 계약해야지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 없이 혼자서 집 보러 다닌 게 얕보였던 걸까. 그 예산이면 제일 낮은 층수와 북향으로만 가능하다고 500,1000만 원 정도 더 올리면 좋은 층수로 가능하다며 또 다른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그 금액 정도는 가능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빠서 원래 금액 아니고선 힘들다고 답했다. 한 칸짜리 좁은 부동산에서 공인중개사 2명과의 팽팽한 기싸움. 더 있어봤자 시간 낭비 같아서 어차피 집 근처이니까 층수랑 방향 알아보시고 연락 달라했다. 계약서는 그때 써도 된다며 부동산을 빠져나왔다. 1주 후에 다른 부동산에 물어보니까 원래 금액으로 9층 동향으로 해주겠다고 하더라. (짜증)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됐을까. 연도는 좀 됐지만 입지가 워낙 좋아 매물이 금방 빠지는 오피스텔 전세가 하나 나왔다. 부동산에 연락해봤더니 먼저 본 사람이 계약을 고민하고 있어서 아가씨는 후순위란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 일희일비했겠지만 평온하게 계약 안 되시면 연락 달라고 문자를 남겼다. 다행히도 먼저 본 사람이 우유부단하게 구는 바람에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동안 발품의 보상으로 집에 들어가자마자 이 정도면 여러모로 합격선이라는 걸 단번에 느꼈다. 구경한 지 반나절만에 계약 의사를 전달하며 다만 전세대출자금을 알아봐야 하니 계약일은 좀 여유롭게 잡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친절한 부동산은 결코 아니었으나 양아치가 아니면 됐다.


D-15 대출부터 계약까지

시중 은행이랑 카카오 뱅크랑 비교해봤을 때, 후자가 금리도 낮았고 시중 은행에서 거는 조건들을 충족할 필요도 없고 중도상환 수수료도 없는 게 마음에 들었다. 번거롭게 방문할 필요도 없이 앱으로 서류를 업로드하고 휴일에도 대출을 실행할 수 있는 점도 정말 편했다. 다만 입주일로부터 15일 전에는 신청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시중 은행은 상황에 따라 1주일 내로도 대출 실행이 가능하다.)

    어쨌든 계약서와 계약금을 처리하기로 한 날, 필요한 서류들을 잔뜩 챙겨서 부동산으로 향했다. 임대인이 도착하기 전 10분 남짓, 공인중개사와 계약서에 명시해야 하는 사항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전세보증보험에 대한 협조 그리고 잔금일 익일까지 현 등기부등본 유지할 것. 분명히 사전에 통화로 말한 내용이었는데도 '알겠다고만 한 거지, 계약서에 적겠단 뜻은 아니었다'라는 입장으로 나와서 당황했다. 나도 중개수수료를 내는데 서럽게도 부동산에선 임차인보다는 임대인의 입장이 우선인가 보다.

    어차피 부동산에서도 오늘 계약을 못하면 임대인에게 볼 면목이 없을 거란 생각에 강하게 나갔다. 돌아오는 중개인의 반응은 비수처럼 다가왔다. '요새 누가 그런 특약을 넣냐, 그렇게 불안하면 월세 살지 그러냐'등의 발언과 함께 날 까탈스럽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취급했다. 임대인이 마땅치 않아해 하면 적극적으로 조율해줄 줄 알았는데 되려 먼저 나서서 차단하는 모습에 기운이 빠졌다. 임대인이 도착하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임대인은 꽤 쿨 해보였지만 중개인이 나의 요구를 부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자 쫄리기 시작했고 혹시 몰라 챙겨 온 명함을 꺼내 줬다. 그러자 분위기가 급전환된게 현타포인트. 갭 투자며 전세보증금 돌려주지 않는 주변의 사례를 들며 양해를 구하자 본인 세대들의 잘못이지 않겠냐며 씁쓸해하며 나의 요구조건에 쿨하게 동의해줬다.

    생각 외로 진이 빠지는 계약서 작성까지 마치고 남은 서류 작업을 처리하니 이사일이 딱 1주일 정도 남았다. 퇴근하면 박스에 이삿짐을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고 잠들었다. 정말 매일매일이 정신없었지만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기뻤다. 멀고 험난한 이사하기의 막장이 코 앞이었다.


D-day 그리고 D+7

이사를 하면서 생각 외로 돈 나갈 일이 많았다. 심지어는 전입할 때 엘리베이터 사용료를 내야 한단 얘길 듣고 너무 황당해서 말을 잃었다. 부모님께 내는 거 맞냐고 물어보니까 그 정도 사용료면 저렴한 편 이래서 두배로 황당했다. 안 낼 수는 없으니까 다른 부분에서 절약이 필요했다. 가성비 따져서 1톤 트럭은 고고밴 코리아를 통해서 불렀고 청소는 학교 커뮤니티에서 추천받은 청소 아주머니께 의뢰했다. 원룸이라서 내가 해버릴까 싶었지만 이전 집에서도 간단히 청소해야 하므로, 도저히 짐도 운반하고 두 곳 모두 청소할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가장 돈 잘 쓴 곳은 청소요, 두 번째도 청소였다. 청소 아주머니의 손길로 깔끔해진 새 집에 이삿짐을 우겨놓고 대충 이부자리를 펼쳐놓고 누웠는데 아직은 새 집이 에어비앤비같아서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난 듯했지만 아직 전세보증보험 서류 작업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애써 잊으며 잠을 청했다.

    이튿날 인터넷으로 전입신고까지 마치고 HUG전세금 반환보증보험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정리했다. 진짜 서류 작업이 지긋지긋하다고 느껴지던 차, 인터넷으로 신청할 수 있어서 좀 편했다. (그래도 제출할 서류가 많긴 했다.) 23일에 신청했는데 24일 접수 알림을 받았고 30일에 발급 완료됐으니까 7~8일 정도 소요된 셈이다. 보증료 납부까지 마치고 나서야 힘들었던 이사를 끝맺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내 집 장만에 열광했는지 엄청 와 닿았던 시간들이었다. 그동안 이사한다고 주변 사람들을 엄청 괴롭혔는데 여러모로 도와준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더불어 다음 이삿집은 자가이길 바라는 소원과 함께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창문에 돌을 던질 자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