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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령 Sep 08. 2020

고양이와 함께한 6주간의 캠퍼밴 생활 (여행 아님)

캠퍼밴 여행이 아니라 캠퍼밴에서 먹고 자고 삶을 살았습니다.

루나의 공격성이 가장 심했을 때

루나가 4주 차일 때 데려왔던 집에서 10개월을 살고 새로운 도시로 이사 오게 되었다. 문제가 생겨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약 6주간 캠퍼밴에서 지냈었다. 캠퍼밴 앞에 큰 텐트가 있어서 그 안에 캣터리(일명 뉴질랜드 고양이 호텔)에서 빌려온 큰 철창을 두고 루나를 그곳에 지내게 하려 했었다. 

원래는 캣터리에 루나를 맡기려고 했었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었고, 다른 숙소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차선책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최대 2주만 캠퍼밴에서 지내고 이사를 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도 6주나 지낼 거라고는 당시엔 전혀 몰랐다.

 

캠퍼밴에 도착해서 철창 안에 루나의 최애 담요와 장난감들을 배치하고 물그릇과 밥그릇, 모래 화장실을 넣어둔 뒤 루나를 캐리어에서 옮겼다. 우리가 짐을 옮기는 동안 루나는 담요 아래로 숨어서 냐옹 거리며 울었다. 몇 시간이 지나면 그칠 줄 알았지만 루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계속 울어댔다. 혹시 우리 옆에 있으면 나아질까 해서 철창에서 꺼내 캠퍼밴으로 들어오니 루나가 확실히 진정했다. 그래서 낮에는 철창에 두고 밤에 잘 때만 캠퍼밴에서 지내게 하려다가 진정하는 루나를 보고는 좁은 캠퍼밴에서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소파 침대였던 터라 침대 밑에 넓은 공간이 있어서 루나의 밥그릇과 물그릇을 그 아래로 뒀고 루나의 모래 화장실도 캠퍼밴 안에 있는 화장실 바닥에 둬서 루나가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하필 캠퍼밴에서 머물 때가 뉴질랜드에서 가장 더운 12월 중순에서 1월 말이었는데, 다행히 소파 아래 공간이 루나에게는 더운 낮에 숨어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었다. 


루나가 가장 좋아하던 찬장


루나는 생각보다 빨리 캠퍼밴 생활에 적응했다. 배변 실수도 하지 않고 모래 화장실을 잘 이용했으며 물과 밥도 잘 먹었다. 큰 집에서 살다가 좁은 캠퍼밴에 갇혀서 외출도 못하는 루나가 안쓰러워서 좋아하는 간식도 정말 자주 먹였었다. 

하지만 우리가 캠퍼밴에서 놀아주는 걸로는 외출할 때처럼 본능을 해소하지 못해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루나가 공격성이 심해지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당시 머물던 곳은 시내 중심에서 많이 떨어졌고 주변에 이웃과도 거리가 멀어서 우리가 지내는 캠퍼밴과 친구가 살던 가정집을 제외하고는 초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잠깐의 외출은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하네스를 사 와서  친숙해지는 연습을 한 뒤 하루에 10분 정도 함께 외출했다.

루나는 하네스를 찬다는 것은 외출을 한다는 걸 금방 인지해서 다른 고양이들과 다르게 하네스 착용하는 걸 매우 반겼다. 캠퍼밴 바로 옆에 위치한 나무에 가서 냄새도 맡고 줄을 좀 길게 한 다음 루나가 가는 걸음걸음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나름 우리만의 팀워크로 위태로운 외출 생활이 이어졌었다. 외출이 끝나고 캠퍼밴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루나가 좋아하는 간식을 주었다. 그래서 캠퍼밴으로 오면 맛있는 게 있다.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확실히 외출을 시작한 뒤로 루나는 진정되어가는 듯했지만 우리가 문을 열 때 탈출하려는 시도가 계속돼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외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남자 친구의 차 소리에 놀란 루나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바람에 하네스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루나는 캠퍼밴으로 뛰어들어갔지만 그날 이후 외출을 멈추었다. 루나가 다른 곳을 도망가서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내가 놀라서 세게 잡아당겼다면 혹시나 생겼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무서워졌다. 그리고 이 날 바로 하네스를 버려버렸다. 

혹시 루나와 다시 임시거처에 머물게 된다면 절대 외출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루나의 티비가 되어주었던 캠퍼밴 창문과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고작 며칠이었지만 매일 하던 외출을 못하게 되니 루나가 또다시 우울해졌다. 그런 루나를 보면서 '괜히 쓸데없는 희망만 줘서 애를 더 괴롭게 만든 건 아닐까'하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서 같이 노는 시간을 많이 늘리고 함께 있어주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고양이와 함께하는 캠퍼밴 생활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6주나! 지금이야 추억이 된 경험이지만 남자 친구, 나, 루나 모두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환경이었다.

생후 3달이 지난 후부터는 해가 떠있는 시간에는 마음대로 외출을 하다가 갑자기 전에 살던 방보다 작은 곳에서 갇혀서 모래 화장실을 써야 하는 상황이 루나에게는 달가울 리 없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건강히 잘 버텨준 루나에게 너무 감사하다. 

루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새로운 집에 이사 온 뒤로는 루나가 원래의 생기를 되찾았다. 새로운 집에 이사 온 뒤로도 한 달 동안은 집안에서만 생활했지만, 캠퍼밴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과 탐험할 곳이 많아서인지 루나는 잘 적응했다. 

(참고로 얘기를 하자면 우리는 이 캠퍼밴을 타고 여행을 한 게 아니라 친구가 사용하지 않는 주차된 캠퍼밴에서 생활했었다.)



최근에 루나의 안 쓰는 물건들을 집 근처에 있는 캣터리에 기부하려고 방문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되어 있어서 놀랐다.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고양이들이 철창 안에 갇혀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는데 직접 방문해보니 거부감이 싹 사라졌다. 

철창 안에는 캣타워나 쿠션, 아이들이 숨을 수 있는 공간 등 아이들에 맞게 꾸며놨다. 그 옆에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아이들이 나갈 수는 없지만 밖이 트여있어서 바람이 드나드는 공간이 있었다. 여기에는 큰 나무와 캣타워, 각종 고양이 장난감으로 가득 찬 일명 고양이들의 놀이터가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들이 하루 종일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원하면 밖에 나와서 나무를 올라타기도 하고 터널에 들어가서 노는 등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지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머물고 있던 아이들이 너무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고, 캐터리 주인에게 와서 머리를 비비는 걸 보니 주인이 고양이를 얼마나 잘 돌봐주고 있는지 느껴졌다. 


그래서 아마 예전과 같은 상황이 생기면 루나를 못 보는 기간을 감수하더라도 캣터리를 이용할 것이다. 

내가 캠퍼밴 생활을 하면서 가장 무서웠던 상황은 우리가 방심한 새 루나가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확신은 없다. 그래서 차라리 전문가가 잘 돌봐주는 캣터리에 머문다면 루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캣터리를 이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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