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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욱 Oct 08. 2017

기구의 기구한 운명

기구의 역사

    어렸을 적에 <박씨전朴氏傳>을 읽은 기억이 난다. 상당히 특이한 내용이었다. 천하의 박색인 박씨 부인이 절세의 미인으로 변신한다는 이야기-우리나라가성형 강국이 될 예언이었구나!-도 인상적이지만, 친정 아버지인박도사가 학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다는 대목도 기억난다. 또 병자호란이 났을 때 박씨 부인이 청나라장수 <용골대>와 <용홀대> 형제를 맨손으로 물리친 일도 또렷이 기억나는데, 그들의 이름이 참 특이해서 기억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용골대 형제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몽골Mongol과도 아무런 인연이 없는 프랑스 사람 ‘몽골피에 형제 Montgolfier brothers’의 이름을 들아봤을 것으로 안다.


거꾸로 세운 종이에 열기를 불어넣어주면 하늘 높이 날아간다. 풍등. 문경희 사진.

    몽골피에 형제는 프랑스의 리옹에서 종이를 만들던 사람들로 종이에서 기구로 나아갔다. 활활 타는 불 위에 종이를 올려 놓으면 종이가 떠오른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지만 몽골피에 형제는 여기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들은 열기 위에 종이 봉투를거꾸로 세워보았는데 상당한 높이로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아주 큰 종이봉투를 만들고 열기를 계속 공급한다면 사람도 싣고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열기구(hot + air + balloon)다. 즉, 熱+氣+球!


열기구는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몽골피에>라 불렸다. 제주항공우주박물관.박지욱 사진.


    1783년에 용골피에, 아니 몽골피에 형제는 직경 10미터나 되는 열기구를 만들었다. 기구 아래에는 바구니를 매달아, 실험 동물들을 먼저 태워 베르사이유의 하늘로 올려보냈다. 3km 를 날아다니다가-물론 아래에서 밧줄로 당겨 조종을 했다- 지상으로 끌어당겨 내렸는데 동물들은 무사했다. 다음에는 사람 차례이지만 공교롭게도 고소 공포증이 있었던 형제들은 기구에 탑승하지 않았다.

    형제를 대신하여 같은 해에 물리학자와육군 장교가 열기구에 직접 탑승하여 22m 상공까지 올라가 8Km를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유인 비행의 성공으로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는<몽골피에 Mongolfiere>라고 불렸다.

그 해가 가기 전에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hydrogen를 사용하는 기구가 발명되어 43km의 비행에 성공했다. 이제 번거롭고 위험한 화로(火爐)를 실을 필요가 없어져 열기구(熱氣球)에서 열(熱)이 떨어져나와 기구(氣球)로 불렸다. 하지만 비행 기구에 대한 각국의 관심과 열기(熱氣)는오히려 더욱 뜨거워져 이탈리아, 영국, 미국에서도 수소 기구를제작하고 비행에 성공하였다.

    1785년에는 처음으로 승객을 실은 기구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영불해협)을 횡단 비행하는데 성공했고, 9년 뒤인 1794년에는 프랑스 군에서 기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구가 발명된 지 11년만에, 오스트리아와 전쟁 중이던 프랑스 육군은 전장 상공에 수소 기구를 띄워 적정을 살폈다. 전투에 유리한 '고지(高地)(!)'를 이렇게 하늘에서 선점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자신들을 손바닥 보듯 훔쳐보는 프랑스 군에게 '비신사적 행위'를 한다고 맹비했다.

    기구에 재미를 붙인 프랑스는 몇 대의기구를 더 만들어 전선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집트 원정 때 관리 소홀을 틈타 영국군이 기구를 공격하여 파괴했다. 격노한 나폴레옹은 1799년에 기구 부대를 해체했고, 동시에 프랑스인들의 기구 열기도 빠른 속도로 식어버렸다.


기구의 바구니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반대편에 사람을 태웠다. 뮌헨 도이치뮤지엄. 박준영 사진.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사정은 달랐다. 프랑스의 비신사적인 행위를 맹비난하던 태도를 180도 바꾸어 기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키워 전격적인 무기화에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군은 북 이탈리아에서 200대나 되는 기구에 시한폭탄까지 실어 적진으로 날려보내는 최초의 '공습'시도를 했다. 하지만 바람 방향이 바뀌어 폭탄들이 되돌아와서 피해를입었다. 비신사적인 행동에 대한 응징을 스스로 당한 것이다. 이후로 19세기 후반이 될 때까지 유럽에서 군용 기구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항공 역사 초창기를 장식했던 유인 기구비행이 역사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은 공중에 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날 수는 있지만 조종이 안 되면, 다시 말해 어디로 날려갈지 모른다면 기구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조종이 가능한 비행 기구가 필요했고, 그것이 곧 비행의 정의가 되었다. 난다는 것에 더하여 원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 말이다.


현대의 열기구는 관광용으로 많이 쓴다. 터어키 카파도키아. 신경진 사진.


사진을 제공해주신 문경희, 신경진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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