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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욱 Oct 15. 2017

활주로 끝의 까만 얼룩  

비행기 타이어의 처참한 파편들

    샌프란시스코나 뭄바이에서 마지막으로 땅을 디뎌본 뒤로 오랫동안 공중에서만 지내온 바퀴들은 활 모양으로 구부러져 머뭇머뭇 느리게 내려오는 바람에 꼭 정지해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곧 비행기의 속도와 무게를 깨닫게 해주는 연기를 폭발적으로 피워 올리며 영국의 활주로에 고무 자국을 남길 터였다.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활주로 끝에서 비행기가 착륙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맑은 날에는 경쾌하게 내려오는 항공기들도 바람이 부는 날에는 아슬아슬하게 좌우로 흔들리며 내려온다. 그러다가 바퀴(랜딩기어)가 활주로에 살짝 닿은 순간 가벼운 충격과 함께 바퀴는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속도를 줄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항인 제주국제공항의 활주로에 여객기가 막 착륙하는 장면. 박지욱 사진.


     착륙하는 여객기들은 대략 시속 270km 내외의 속도로 활주로에 접근한다. 이 정도면 얼마나 빠른 속도일까? 걸어가는 인간의 속도는 시속 4km, 달려가면 시속 7km 정도다. 마라톤 종목 세게 기록 보유자들은 시속 20km를 내고, 100미터 달리기의 세계 기록 보유자인 유사인 볼트가 100미터 달리듯 계속 달리면 시속 36km를 낼 수 있다. 프로 야구의 일급 투수들이 던진 강속구는 최고 시속 150km를 찍으며 타석으로 파고들고, 타자들의 방망이를 떠난 홈런볼의 구속은 그보다 조금 더 빠르다.

    필자가 타고 다니는 승용차의 계기판에 붙은 최고 속도는 시속 220km이지만, 인간의 신경 신호 전달 속도는 시속 180~400 km에 이른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비행기 중 가장 빠른 것은 SR-71 블랙버드로 음속의 3.3배에 이른다.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음속의 2배를 넘었지만, 요즘 국제선 여객기의 순항 속도는 음속의 0.8을 넘기는 수준인 시속 900km 정도다. 여객기들의 이륙 속도는 시속 200~300km 정도이고, 착륙할 때도 그 정도 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인간의 신경신호 전달 속도 내에 있다.    


보잉747 점보의 바퀴는 무려 18개다. 박지욱 사진.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면서 활주로에 접근하는 동안 기어 박스가 열리면서 바퀴는 긴 잠을 깨고 기지개를 켠다. 비행 중에 엔진은 한순간도 쉬지 못했고, 날개는 엄청난 바람에 맞서며 기체를 들어 올렸는데, 오직 바퀴라 불리는 랜딩기어만이 적재함에서 포개어져 들어가 길게 늘어져 잠을 잤다. 그러다 느닷없이 적재함이 환하게 열리고 거센 바람 속으로 바퀴는 내려와 공중에 달랑 매달린다. 바퀴가 영혼이 잇는 물체라면 분명히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본연의 임무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공중에 공중에 달랑거리며 무(無) 회전 상태로 매달려 있던 바퀴는 고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곧 활주로와 쿵-하고 부딪힌다. 그리고 몸을 굴리기 시작한다. 바퀴의 일이 시작된 것이다. 무회전에서 순식간에 시속 270km 정도로 활주로를 질주하는 항공기의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 대략 1초에 25바퀴를 돌아야 그 정도 속도가 나온다. 초당 25바퀴!


비행기의 바퀴는 랜딩 기어로 불린다. 뮌헨 도이치 뮤지엄. 박준영 사진.

    그 속도에 이를 때까지는 바퀴를 돌려주는 것은 바로 딱딱한 활주로 바닥이다. 관성의 영향을 받는 바퀴는 가만있으려 상대 속도의 영향을 받는 활주로 바닥은 어쩔 수 없이 바퀴를 강제로 돌릴 것이다. 이때 너무나도 당연하게 바퀴와 활주로 사이에 마찰이 생기고, 그래서 바퀴가 타면서 연기까지 나는 것이다. 잠시 후 바퀴가 항공기 동체의 질주 속도만큼 따라잡으면 더 이상 활주로 바닥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더 이상 연기는 나지 않게 된다.

착륙 순간에 타어어에서 나는 연기. 제주공항. 박지욱 사진.

    비행기 창가에 앉아 창밖으로 활주로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활주로의 양끝 부근의 바닥에 가만 딱지들이 붙은 것을 볼 것이다. 자세히 보면 급정거를 하는 자동차 바퀴가 남긴 자국 즉, '스키드 마크(skidmark)'와 다르지 않다. 항공업계에서도 이 까만 딱지를 스키드 마크’라 부른다.

    하지만 자동차의 스키드 마크는 달리는 바퀴가 가만있는 땅바닥에 마찰을 일으켜 타이어의 고무가 녹으면서 생기지만, 활주로의 스키드 마크는 가만있는 비행기 타이어와 비행기 진행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활주로 바닥과 마찰되어 생긴 자국이다. 모양은 같아도 발생 원리는 반대다. 한 마디로 활주로 끝의 까만 바퀴 자국, 생각해 보면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의 뜨거운 마찰로 생긴, 비행기 타이어의 처참한 파편들이다.


착륙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활주로라면 활주로 끝에 얼룩이 없다. 제주공항 남북(13-31) 활주로 북단. 박지욱 사진.


    활주로의 스키드 마크는 고무가 타서 엉겨 붙은 것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제거작업을 해야 한다. 스키드 마크 위에 다른 비행기들의 바퀴가 닿으면 정상적인 마찰이 일어나지 않아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활주로도, 세상도 적절한 마찰이 있어야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것이다. 마찰이 없다면 우리는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느듯, 마지막 연재글입니다. 그동안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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