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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 Kim Dec 09. 2020

내 인생을 망칠 두 명의 빌런이 나타났다

버티듯 살아가는 <스토너>에게서 위로 받기

여기 대학 교수 '스토너'가 있습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 남들이 다 전쟁에 참여하는 와중에도 대학에 남아 꿋꿋이 자기 공부를 하는 개인주의자입니다.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지도 않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지도 않는 아싸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빌런 한 명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빌런은 자신의 아내 '이디스'입니다.



스토너가 홀딱 빠져 결혼까지 골인했지만 그 이후의 삶은 인내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아내는 청혼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자신에게 도통 관심도 없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히스테리를 부리기 일쑤입니다.


자신과 상의도 없이 갑자기 큰 집을 사고는 진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선 이 집이 필요하다고 애원합니다. 결국 스토너는 그 집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늘리고 대학에서만 살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신중해야..


여기서 끝나면 그나마 좋겠지만 문제는 계속됩니다. 이디스가 딸아이를 낳은 후에 그 애를 자신의 통제 안에만 두고 싶어하는 겁니다. 스토너와 조금만 얘기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잔소리를 하고 나중에 꼬투리를 잡아 야단칩니다. 딸은 아빠를 슬슬 피하게 되고 스토너는 딸과 가까워질 기회 없이 그대로 늙습니다.



가정이 이 모양이면 일에서나마 보람을 찾고 힘을 얻어야 할 텐데 그것도 어렵습니다. 두 번째 빌런인 동료 대학교수 '로맥스' 때문입니다.


로맥스 교수가 아끼는 제자의 대학원 입학 면접에서 스토너가 안 좋은 점수를 준 게 화근이었습니다. 이후 둘은 계속 부딪힙니다. 그리고 하필 그 로맥스가 학과장이 됩니다.


학과장은 교수들의 수업과 시간표를 짤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 일에 대한 복수로 로맥스는 스토너에게 지옥의 시간표를 선물해줍니다. 대학원 세미나 수업을 하던 사람에게 학부 1~2학년 수업을 배정하고, '아침 일찍 수업 + 긴 공강 + 오후 늦게 수업'의 연속으로 워라밸을 붕괴시킵니다.


그 짓을 로맥스는 매해 반복합니다. 스토너가 죽을 때가 될 때까지 평생.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당한 것처럼 억울한 일들이 스토너에게 계속 벌어지니까요. 그걸 보면서도 스토너는 빌런들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내내 패배합니다. 우리가 흔히 소설에서 바라는 통쾌한 복수 같은 건 끝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스토너에게도 잠깐 좋은 시절이 있긴 했습니다. 같은 학교의 강사와 사랑에 빠져 중년이 돼서야 제대로 된 사랑을 알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로맥스가 소문을 퍼뜨려서 여자는 대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렇게 독자에게 고구마만 잔뜩 먹이는데도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참 이상했습니다. 묘한 위로감이 느껴졌으니까요. 좋은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 대부분을 버티듯 살아갔던 스토너에게요.


아마 대부분의 인생은 스토너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삶을 바라고,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내 뜻대로 펼쳐지지 않은 채 늘 무언가와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빌런 하나가 없어졌다 싶으면 또 다른 빌런이 나타나 일상을 괴롭히죠.


제겐 그 빌런이 어렸을 땐 술을 마시고 저를 다그치던 아버지였고, 좀 컸을 땐 저를 콕 집어 괴롭히던 일진이었으며, 군대에선 성격이 맞지 않은 맞선임이었습니다. 슈퍼 히어로처럼 맞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쭈구리처럼 버텨야 합니다.


잠시 빌런이 사라지고 좋은 시절이 오기도 하지만 그건 인생 전체로 보면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찰나의 행복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 시간을 버틸 때 괜찮다는 '말'보다는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누군가의 '삶'에서 위로를 얻기 마련입니다. <스토너>를 읽고 여운이 깊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나봅니다.


혹시 자신이 버티듯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 빼고 모두가 주인공인 것 같다면 이 책을 펴보세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에세이 책보다 더 당신을 위로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지금 내 인생의 빌런을 버틸 힘을 조금은 얻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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