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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 Kim Mar 17. 2022

이집트 돌산에서 8시간 동안 야간 등반하기

개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시나이 산 등반

여행기간: 2021.9.28 ~ 10.11


시작은 호기로웠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야간 등반이었다. 지금껏 밤 한 번 새본 적 없는 나인데도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미 유튜브를 보고 꽂힌 이상 여기에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선택지가 투어를 통한 야간 등반밖에 없다는 얘길 듣고 조금 고민하다가 덜컥 투어비(250 이집트파운드, 2만원)를 지불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나이산 EG12 / 차박차박

https://www.youtube.com/watch?v=ANHT7On5G24

시나이 산에 꽂힌 이유. 하지만 영상과 현실은 달랐다


그렇게 밤 10시 반까지 기다렸다가 다합에서 투어 차량을 탔다. 시나이 산 입구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반. 입구는 한적했고 밤공기는 살짝 쌀쌀했다. 이 밤에도 호객꾼이 돌아다니며 담요를 팔고 있었다.


시나이 산 입구. 이때 도망쳐야했다


오르기 시작할 땐 좋았다. 초반 코스는 평평한 편이라 힘도 거의 들지 않았다. 투어 멤버 중 한 명이었던 무슬림과 얘기도 하고, 어이쿠 하고 쏟은 것 같은 별을 보며 텐션 좋게 올랐다.


그 무슬림은 여길 5번이나 왔다고 했다. 시나이 산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라 개신교도에게도 무슬림에게도 신성한 곳이다. 그 역시 이렇게 수많은 별과 함께 산행을 하며 신의 신성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 얘길 들으니 야간 투어만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야간 등반은 단조로웠다. 개 짖는 소리와 별들만 내 정신을 붙잡아줬다


그러다 오른 지 2시간쯤 됐을 무렵 잠이 쏟아졌다. 중간중간 쉬는 타임마다 투어 멤버들이 말을 걸어줬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별 보는 것도 귀찮고 일행이 말 거는 것도 귀찮았다. 무리에 뒤처지지 않으려 그저 기계적으로 올랐다. '졸려 죽겠다'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만 번갈아 떠올랐다.


이집트 물가는 물론, 한국 물가보다도 비쌌던 매점


그렇게 막판 헐떡고개까지 오르고 나니 매점이 보였다. 여기서 조금 쉬다가 해가 뜨기 시작하면 정상으로 오르기 시작한단다. 꽤 올라오고 나니 기온은 더 떨어졌다. 잠이 오는데도 추워서 자는둥 마는둥 했다. 매점 앞에 야간 등산객을 위해 담요를 쌓아둔 게 있는데 어두워서 보지 못 했다. 해뜬 후 쌓인 담요를 봤을 때 배신감이란..


매점 내부 휴게실에서 추위를 견디며 일출을 기다렸다


30분 정도 기다리고 나니 다시 등반이 시작됐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면서 희미하게 실루엣들이 보였다. 잠이 좀 깼는지 컨디션이 좋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의 풍경은 쾌감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곳에 햇빛이 들며 밤 동안 올라왔던 길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무언가 벅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해 뜨기 직전부터 해가 뜨기까지의 그라데이션 변화도 예쁘고 구비구비 늘어서있는 돌산도 웅장했다. 샴엘쉐이크에서 다합까지, 다합에서 여기까지 오는 여정은 참 길고 지쳤는데 그걸 한 방에 해소해줄 정도였다. 다른 의미로 신성함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내려오는 건 힘들지 않았다. 텐션이 잔뜩 올라서 나 혼자 방방 뛰며 내려갔다. 올라갈 때의 내 꼴을 봤던 투어 멤버들은 저 새낀 뭔가 했을 거다. 실제로 정신이 좀 나가 있는 상태라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산행길도 내려갈 땐 훤히 볼 수 있었다. 분명 몇 시간 전에 올랐던 길인데 하루이틀 쯤 지난 기억처럼 동떨어진 듯 느껴졌다. 몽롱한 상태라 풍경은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려올 때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렇게 끝없는 길을 그 밤중에 올랐다니, 하며 스스로가 대견해서 자존감이 막 차올랐다.


여행 중엔, 특히 해외에선 평소보다 더 쉽게 도전하게 된다. 일단 잘 모르니 더 과감해지고 쉽게 무를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결과물로 이어진다. 두려움과 설렘, 후회와 자책 속에 결국 목표한 곳에 다다랐을 때 그 결과물 역시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꼭 여행에 한정된 얘긴 아니다. 더 읽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끝까지 읽은 후 만난 인생 책, 내 일이 아닌가보다 하며 놓으려 했지만 꾸역꾸역 버티며 이뤄낸 직업적 성취 등등. 빠른 포기도 중요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역시 많다.



딱 8시간 전에 봤던 그 입구를 뒤로 할 때, 걸어온 길을 몇 초간 바라봤다.


단지 산 하나 탄 건데 8시간 동안 정말 별의별 것을 보고 별의별 것을 느꼈다. 그 시간만큼 내 잠은 희생됐지만 이 정도면 하룻밤 안 자도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몽롱한 와중에 투어 차량을 타고 돌아가며 그런 생각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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