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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Dec 06. 2024

여행의 시작은 설레임으로

파리 도착

여행 일정과 예약한 표로 무장하고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따뜻한 감정이 아래로부터 서서히 올라오고 리무진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의 공기는 다정하다. 머릿속으로 잊은 건 없는지 점검하며 자다 깨다 하니 공항도착.


비수기라는 11월인데 공항은 연휴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여유 있게 도착했지만 긴 줄을 보니 비행기 탑승구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여 일단 짐을 부치기 위해 줄을 섰다. 얼마 후 모바일 탑승권이 안 열리는 사태 발생...


우리는 속상해하며 긴 줄에서 나와 탑승권을 발급받고 다시 섰던 줄로 돌아갔더니 세련된 승무원이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낸다. 헐레벌떡 당황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중간에 넣어준 건 그 옆에 있던 사람 좋아 보이는 다른 승무원이었다.


사정을 말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네 그렇죠. 수고하셨어요. 어서 여기로 오세요" 마치 기다린 사람을 맞이하듯 어떤 특혜가 아닌 사정이 있음을 주위의 모두에게 알리는 듯한 배려심이 고마웠다.


짐 검사를 마치고 공항 탑승구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다른 세상을 향해 가기 전 그 설레임의 공간에서 나는 주로 책을 읽는다.


14시간이 넘는 긴 비행시간은 무엇보다도 기대되고 편안함을 보장받는 시간이다.


세상 모든 소식의 근원인 핸드폰을 끄고 공간이동도 할 수 없어 정해진 자리에 그저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시간. 졸리면 자고 영화를 보고 싶으면 보고 밥을 주면 먹고 차를 주면 마시고. 거의 신생아와 같은 그 상태를 나는 사랑한다. 비행기 안이 아니라면 우리가 언제 이렇게 편안하고 어느 누구의 비난도 없이 철저히 수동적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이것저것 잘 차려진 기내식을 먹을 때마다 생각한다. 여행은 설레는 일이지만 이렇게 많은 일회용품을 배출해도 되는 걸까. 기내식의 종류를 단순화하면 어떨까. 예를 들면 주식과 반찬 한두 가지만 주는 방식으로. 비행기에서는 움직임이 거의 없으니 그렇게 많은 칼로리가 필요하지 않고 평소 식사를 할 때 여러 종류의 간식을 포함한 식사를 하지 않으니까. 어느 승무원의 말이 떠오른다. 비행기 안은 일회용품의 천국이라고...


파리의 비르하켐 다리가 나온다는 영화 '인셉션'과 단편영화 몇 편을 보고 테트리스 게임을 하고 있는데 파리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려고 했으나 짐이 무거워 볼트를 타기로 했다. 볼트는 유럽형 민간 택시이다. 일반인이 사업자 등록을 하고 호출앱을 통해 호출을 하면 택시처럼 탈 수 있다. 운영방식은 우리나라 카카오 택시와 비슷하다. 숙소나 가고자 하는 곳의 주소를 미리 등록해 두면 유용하다. 사전예약도 가능하고 카드를 앱에 저장해 두면 자동결제도 된다. 우버나 택시 보다 요금이 저렴해서 자유여행자들은 볼트를 많이 이용한다.


볼트를 타기 위해서는 드골 공항 5층 입국장에서 3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VTC Ride app pick up”이라고 쓰여 있는 바닥 글씨만 따라가면 볼트와 우버 타는 곳에 도착한다. 택시 타는 곳과는 다르니 유의해야 한다.


볼트는 미리 부르면 오류가 나기 쉽다. 부른 사람이 있는 장소를 인식해서 호출이 되기 때문에 미리 부르고 이동을 하면 볼트기사가 찾아오기 어렵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몇 번 했다. 그래서 타고자 하는 장소에 가서 불러야 한다. 그랬음에도 못 찾아서 헤매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어도 짧은 우리와 볼트기사의 대화는 거의 외계어... 마침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청년이 도와주어서 볼트기사를 겨우 만났다. 드골공항에서 파리 5구에 있는 숙소까지는 1시간 정도 걸렸다. 원래는 40분 정도 걸리는데 우리가 도착한 것이 금요일 저녁 퇴근시간이라 더 막혔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파리를 달리며 기사는 샹송을 틀어주었다. 비로소 프랑스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숙소에 도착했다.

커다란 파란 대문이 인상적이었지만 거기까지. 비밀번호를 누르고 육중한 문을 온 힘을 다해 밀고 들어가면 마당이 나오고 또 하나의 문이 나온다.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서 작은 공간을 지나 다시 문을 밀고 들어가면 숙소 문 앞. 거의 우리나라 80년대식 다이얼 열쇠 단자함에서 열쇠를 꺼내 문 열쇠구멍에 넣고 몇 번이고 돌려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한 번씩 해본 다음 어쩌다 열린다. 마당이 나오고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니 드디어 숙소. 입성 성공.


조선시대 왕이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삼엄한 숙소 입성 단계를 거친 우리는 숙소에 들어온 것만도 감사하다. 이 복잡한 입성과정을 며칠 동안 반복하니 익숙해져서 집에 돌아와서는 너무 쉽게 들어가는 우리 집이 한동안 불안했었다.


숙소의 전체 모습을 보며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숙소는 역시 사진빨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공간이 넓고 침대는 깨끗해서 위안이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밤중에 도착한 우리는 가져온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런데 식재료 몇 개를 씻고 나니 주방 개수대의 하수구가 막혀 버렸다. 더불어 식기 세척기 배수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방에 있는 장롱문이 잠겨 열리지 않았다. 7박이나 머물러야 하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설거지는 욕실에서 해결하면서 주인장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전문회사에 위탁을 했는지 해결하는 팀이 계속 바뀌고 다음날 외출한 우리에게 열쇠를 보관함에 넣어 달라고 하는 등 불편을 끼치더니 이틀 후 스스로 들어와서 고치고 갔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숙소 주인장은 우리에게 첫날 숙박료의 50%를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우리의 불편을 인정해 준 것 같아서 위로가 됐다.


파리에서의 첫날은 숙소와의 씨름이었지만 이 모든 불편이 여행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니 나쁘지 않았다. 작년 겨울 포르투갈 여행을 갔을 때도 에어비앤비 숙소였는데 여러 전기제품을 동시에 썼더니 전기가 나가버렸다. 캄캄한 숙소에서 우왕좌왕했고 메시지를 보내도 주인장은 읽지 않았다. 오밤중에 건물에 있는 주인장 집을 찾아가 시끄럽게 두드리니 앞집 사람이 나와 집에 없다고 했다.


낯선 나라 낯선 공간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당황하면서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은 스스로 해결했다. 인터넷! 이런 사례가 종종 있는지 유럽에서 전기가 나갔을 때 대처하는 방법이 나와 있었다. 계량기를 조정해서 전기가 들어왔을 때의 기쁨이란. 뒤늦게 연락이 된 주인장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듯 다행이라는 짧은 한마디만 남겼다.


저녁을 먹고 다음날 여행 일정을 이야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첫날밤은 설레임을 준다. 그래서... 잠이 안 온다. 우리는 모두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우리나라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날은 친한 작가들과 저녁을 먹고 밤 10시가 넘은 시간 차가 없는 한 명을 태우고 그녀의 집에 데려다주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익숙한 사거리에서 익숙하게 우회전을 했는데 갑자기 버스가 달려와 내 차 옆구리를 사정없이 긁으며 지나갔다. 앞범퍼는 힘없이 떨어졌고 길에 내 차의 잔해가 흩어졌다.


다행히 나와 작가님이 다친 곳은 없었다. 대학 통학 버스였던 차의 운전기사분은 내리더니 자신도 몸에는 이상이 없는데 차가 많이 긁혔다고 한다. 결론은 내 과실 100%... 우회전 차량에 대한 교통법규가 강화되어 정지선을 지켜야 했고 횡단보도 신호등도 지켜야 했는데 나는 늘 다니던 길이라 익숙해서 무심코 지나쳤던 것이다.


내차는 견인되고 남편과 아들이 와서 이래저래 사고 처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핸드폰 카톡방이 난리가 났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비. 상. 계. 엄! 내 눈을 의심했다. 순간 사고가 나서 내 머리가 이상해진건가 생각했다. 그게 아니란 걸 안 순간부터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와 기억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지켜봤다. 여의도 국회 앞으로 달려간 시민들처럼 달려가진 못해도 지켜봐야 한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80년 그날처럼 당하진 않을 것이다.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의 침착하고 일사불란한 처리로 게엄은 해제되었다. 그러고도 무슨 위협이 있을지 몰라 한참을 지켜보다 사태가 진정된 듯 보여 잠깐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알던 익숙한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설마 하던 위협이 생생한 현실이 된 장면들이 끝없이 미디어를 통해 드러났다. 총을 든 군인과 탱크의 위협 속에서도 그들을 저지하던 시민들의 빛나는 용기, 한달음에 달려 나와 국회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 동영상을 찍는 핸드폰을 두려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던 사람들의 모습, 국회의원의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보좌진들...


어리석은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악의 최고치를 목도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용기의 최고치도 함께 보았다. 나는 아직도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나간 것이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다시 차가운 겨울의 광장에 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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