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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Dec 20. 2024

파리의 성당

노트르담과 생트샤펠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앞에 있는 센강 위 다리 하나를 건너면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2019년 어느 봄날 불타고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화재로 첨탑이 무너지던 순간은 세기말인가 할 정도로 놀라웠다. 첨탑과 지붕 등이 붕괴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신속한 진화작업으로 성당의 가장 기본적인 골조와 정면 탑의 붕괴는 막았다고 한다. 게다가 성당 내부에 있던 문화재들도 잘 대피시켜서 역사적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것을 막았다고 하니 다행이다.


우리가 갔던 11월 초에는 성당 외관 복원은 끝나고 마무리 공사를 위한 크레인만 몇 개 설치되어 있었다. 화재가 나고 5년여 만에 복원이 완료되어 성모마리아 대축일인 2024년 12월 8일 개관한다고 한다. 복원을 위해 수천 명의 작업자들의 땀과 노력, 전 세계 32만 명의 기부자와 8억 4천만 유로의 기부금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로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시민 공동체의 공적 재산이 되었다.

복구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복원된 노트르담 성당을 방문한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사진출처:오마이뉴스 2024.11.29.)


개방을 하지 않아 내부를 보지 못했지만 처음 보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낯설지가 않았다. 미디어의 힘인지 언론에서 수없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노트르담(Notre-Dame)은 '위대한 성모'라는 뜻이다. 고딕양식을 대표한 성당으로 나풀레옹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또한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로 널리 알려진 성당으로 소설을 읽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는데 주인공 콰지모도의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꼽추와 집시라는 겉모습 속에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 당하는 참혹한 고난은 읽는 내내 씁쓸하고 마음 아팠다.


노트르담의 꼽추가 쓰인 15세기 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민주주의는 발전하고 사람들의 인권은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그늘은 도처에 있다. 우리 누구든 그 그늘 속에 언제든 들어갈 수 있고 내 이웃이 편안해야 내 삶도 편안하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으로 지킨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 전 목도했다. 우리 각자가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생트샤펠 성당까지는 센 강변을 따라 걸어서 5~10분 정도 걸린다.


센강이 양쪽으로 흐르는 인공섬인 시테섬에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퐁뇌프의 다리, 생트샤펠 성당이 있다. 센 강가를 걸어가는데 늦가을의 정취가 바람이 불듯 마음속으로 몰려 들어왔다. 일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있다는 낯설음은 설레는 감정이다.


파리 법원 안에 있는 생트 샤펠 성당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한 곳이다. 맑은 날이라면 스테인드 글라스가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에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을 새긴 86개 창문 스테인드글라스와 12 사도의 동상을 정교하게 조각한 12기둥이 있다. 작은 공간이지만 꽉 찬 느낌을 준다.


생트 샤펠 성당은 방문객이 많아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뮤지엄 패스가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예약을 할 때 시간만 예약하면 된다. 예약을 했더라도 현장에서 비수기라도 최소 30분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성수기는 더 긴 시간을 줄 서야 한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린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관람시간은 1시간 정도이다.  


생트샤펠 성당에서 나오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나가려고 하는데 성당 바로 옆에 레스토랑이 보였다.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곳으로 들어가서 줄을 서서 주문을 하고 식사를 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음식이 따끈하고 너무 맛있었다. 잊지 못할 식사였다.


아름다운 성당을 보고 난 후 집에서 엄마가 정성스럽게 방금 해 준 것 같은 맛있는 식사가 오늘 우리에게 왔다. 여행자에게 이보다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싶은 날이었다. 




이 글을 쓰는 사이 우리나라에 많은 일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한 충격과 공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용기 있는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의 신속하고 현명한 대처로 긴박하게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지만 지금도 경각심을 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12월 첫 번째 토요일에 탄핵안이 상정되었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는 수십만의 시민이 모였다. 조금 놀랐던 건 모인 시민들의 반 이상이 10대부터 2030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생기발랄했고 진지했다.


그러나 부결되었다.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의 이면에 도사린 무시무시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의 일상이 속절없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따뜻한 촛불처럼 한강은 노벨상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나라에 닥친 비상계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1979년 말부터 진행됐던 계엄 상황을 검토했는데 2024년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24년 겨울 상황이 다른 점은 모든 상황이 다 생중계돼 모든 사람이 다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저도 그 모습들을 지켜봤는데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서 멈추려고 애를 쓰셨던 분들을 봤고,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면서 제지하려는 모습도 봤고, 총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모습도 봤다. 마지막에 군인들이 물러갈 때 잘 가라고,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소리치는 모습도 봤다. 그분들의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젊은 경찰분들, 젊은 군인 분들 태도도 인상 깊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뭔가 판단을 하려고 하고, 내적 충돌을 느끼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 입장에서는 소극적인 것이었겠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적극적인 행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의 두 번째 토요일 다시 탄핵안이 상정되었다.

사람을 가득 태운 국회의사당 가는 시내버스는 집회로 인해 샛강역에서 다 내려야 한다는 안내를 했다. 한참을 걸어갈 각오로 버스에서 내린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밑으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사방에서 인도를 가득 메우고 사람들이 강물처럼 국회의사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이 있었다. 하마터면 나는 샛강역에 서서 눈물을 흘릴뻔했다.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껴입은 모두는 조용히 질서를 지키며 한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상점 앞에 벽을 따라 긴 줄이  중간중간 있었다. 현장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집회 참여자들을 위해 커피, 국밥, 샌드위치 등을 선결제해둔 상점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 


누군가는 핫팩을, 누군가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길 중간중간에 서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도 있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의 지시도 없지만 우리 스스로 완벽한 평화 공동체를 이루었다. 


경찰들의 안내에 시민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지만 누구 하나 앞서가려 하지 않는다. 국회의사당 훨씬 전 도로부터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게다가 스스로 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 굉장히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특히나 10대부터 2030까지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그들은 밝고 생기 있고 진지했다. 


공간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각자 준비해 온 것들을 깔고 앉아서 조분조분 대화를 나누고 외치는 구호를 따라 하고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았다. 간식을 서로 나눠 먹기도 했다. 국회 앞 모든 공간이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망으로 생기가 넘쳤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그곳에서.


분노와 두려움을 안고 달리던 80년대 우리 세대의 거리에서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고 빛나는 것인 응원봉을 들고 나온 이 생기발랄한 아이들을 보니 많은 감정이 오고 갔다. 이 광장의 모두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각자의 방식으로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구호를 외칠 때는 무척 힘차고 씩씩했다. 그렇게 탄핵은 가결되었고 모두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공처럼 튀어올라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5060 정도 되는 아저씨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아이들에게 인사한다. 젊은이들 덕분이라고 고맙다고.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일단은 기뻐하자. 


조금씩 어두워지는 국회의사당 앞에 형형색색의 빛들이 노래하고 춤을 춘다. 집회가 끝나갈 즈음 사람들은 자신의 쓰레기들을 거두고 조끼를 맞춰 입은 볼 빨간 아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라고 안내한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본 하루였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추운 겨울을 녹이고 마침내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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