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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chae Jul 17. 2020

기차

두 세계를 이어주는 익숙하지 않은 교통수단.




기차



두 세계를 이어주는 익숙하지 않은 교통수단.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나온다. 가족의 품에서 빛의 세계만을 인식하던 주인공 싱클레어는 크로머라는 동급생을 만난 뒤 어둠의 세계를 마주친다. 싱클레어가 인식하는 두 가지 세계는 <데미안> 책 전체를 끌고 가는 주된 갈등 거리가 된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인지하는 두 가지 세계처럼 나에게도 두 가지 세계가 있다. 싱클레어의 세계처럼 밝고 어두운 내면의 세계는 아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리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어쩌면 나의 두 세계는 물리적으로 더 쉽게 구분될지도 모른다.

홍성과 서울.

한 곳은 아직 시로 승격되지 못한 조그만 군 단위 지역이고, 한 곳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이다. 서울을 설명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울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지만, 홍성을 설명하려면 부연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강원도와 헷갈릴 법 하지만 충청남도에 있고, 새우젓, 한우 같은 특산물로 유명하고, 서울에서는 약 두 시간 정도 걸리며 버스와 기차 둘 다 있다고. 이렇게 두 세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방법부터 다르다.




첫 번째 세계인 홍성에는 부모님이 있다.

부모님의 집과 동생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산책길과 집 앞의 푸른 잔디밭이 있다.

 

서울에는 이 모든 것이 없다.

 

대신 서울에는 학교 앞의 조그만 방과,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룸메이트와 가끔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대학교 때문에 분리된 두 세계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구분될 것 같다. 서울에는 직장과 친구들이 있지만, 홍성에는 부모님과 고향 집이 있을 것이다. 두 세계 다 대한민국 지역이고 똑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평행우주처럼 다른 우주로 존재하는 느낌이다. 홍성에서 나는 부모님이 아직 품어줄 수 있는 딸이 되지만 서울에서 나는 홀로 서야만 하는 사회초년생이다.




확연히 다른 이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 기차다. 사실 기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홍성을 오갈 때에는 버스, 기차, 자가용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이 중 내가 제일 선호하고 이용하는 것이 기차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기차를 선호한다고 말하면 보통 기차가 편해서 그런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내가 기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겁이 많기 때문이다. 버스를 탔을 때 일어날 수도 있는 교통사고가 두려워 기차를 선호한다. 멀미를 덜 느껴서, 화장실이 있어서와 같은 기차의 특징보다 교통사고 걱정이라는 사소한 이유로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전혀 생각 못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런 걱정만으로 교통수단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기차가 들어오는 사진과 기차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사진




서울에서 지낸 6년 동안 기차를 탄 일이 셀 수 없이 많아진 만큼, 나는 <프로 기차러>가 되었다. 용산역과 홍성역은 눈을 감고도 발걸음을 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어떤 때는 기차 앱을 통해 할인 쿠폰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기차 안에서 시간을 보낸 방법 또한 다양해졌다. 어쩌면 시간을 보낸다기보다는 시간을 때운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기차를 타는 두 시간은 한 자리에 앉아서 보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보다는 자거나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날은 두 시간 내내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대화만 하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전자북을 이용해 책을 읽기도 한다. 책을 읽을 때면 창 밖의 푸른 논밭을 보며 책을 읽는 것이 기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스러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노래를 듣는 것은 기본이다. 이어폰은 같은 기차 칸 속,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것을 막아준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기차에 타면 이어폰부터 찾는다.

잘 때는 물레방아처럼 쉴 새 없이 목을 어깨에 찧는다. 자는 것만큼 두 시간을 빨리 보내는 방법은 없다. 두 시간이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사라진다. 최근 오디오 북에 빠진 이후에는 2시간 동안 오디오 북만 듣기도 했다. 기차의 바깥 풍경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들어서 앞으로도 자주 애용할 것이다.





기차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면에서 늘 비슷하지만, 기차를 타고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보통 서울에서 홍성을 갈 때 내려간다고 말하고 홍성에서 서울을 올 때 올라간다고 말한다. 지리 상으로도 느낌 상으로도 서울에서 홍성이 내려가는 방향이고, 홍성에서 서울이 올라가는 뱡향이다. 두 가지 방향은 눈물이 날 정도로 다르다. 홍성으로 내려갈 때는 홍성 집을 볼 생각에 설레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반대로 서울로 올라갈 때는 뭉클해진다. 차로 기차역까지 태워다 준 뒤 떠나는 부모님의 차를 보면 가슴이 파래지는 기분이다. 말로는 잘 가라고 인사하면서도 눈은 괜히 차를 한번 더 바라본다. 특히 밤에 기차를 타고 올라올 때면 스치듯 지나가는 노랗고 빨간 조명 빛들이 모두 가슴에 새겨다. 길어봤자 한 두 달 떨어져서  지내고 다시 내려가는데도 기차를 탈 때면 그런 먹먹함이 느껴진다. 홍성에서 가져 온 이 기분은 서울에 도착해서 한강을 보기 시작할 때쯤이 되어서야 풀린다.





어느 초 여름 날 홍성역




이처럼 두 세계는 나에게 완벽하게 다른 세상인데, 이를 관통하는 기차 속에서 나는 어떠한 변화도 느끼지 못한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기차가 세계를 바꿔놓는 느낌이다. 이렇게 앉아서 두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다니, 온도차에 비해 손쉬운 방법인 것만 같다. 그래서 언제나 기차를 타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많은 감 동요를 느껴야 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기차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다른 세계에 다시 나를 적응시켜야 한다.

내가 걱정이나 생각이 많아진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6년 동안 매번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두 시간 동안 몇 번은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겼었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이렇게 자주 기차를 타고 부모님을 떠나 올라오는 경험을 한다면 감수성이 짙어질 수밖에 없다. 이건 자부할 수 있다.





이제 겨우 기차를 탄 지 6년이 되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기차를 타고 다녀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향후 몇 년 간, 내가 서울이나 경기에 있을 것은 확실하다. 이건 내가 그동안은 계속 기차를 타야한다는 뜻이다.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는 기차역은 더더욱 또렷해지고, 아직은 외우지 못한 기차 번호와 시간표를 외우게 될 수도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내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윽고 선로를 바라보다 나는 기차에 오른다. 그 속에서 내려갈 때는 설레고, 올라올 때는 울컥할 것이다. 두 평행 세계에는 언제쯤 익숙해질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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