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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다락 Jul 27. 2020

코로나19와 서양인의 개인주의(마지막)


신이 된 개인들, 불가침이 된 개인의 영역 : I Do What I Want


자, 이렇게 됐을 때 서양에서 코로나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고 치자. 국가가 아무리 마스크를 쓰라고 한들 먹히겠는가? 옆 사람을 위해서 마스크를 쓰라고 해도 “그 사람이 뭔데 내 즐거움을 포기해야 해? 난 내가 원하는 걸 할 거야.”라고 하면 끝이다. 


방역을 위해 나의 동선을 추적한다고? 어디 감히 “나”의 권리를 침해하려고! 모두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아무리 내세워도 “내”가 싫으면 안 되는 거다. 


마스크 착용을 조롱하는 영국 시위자. 미국만 그런 줄 알았더니 영국에서도 수백 명이 모였다고 한다.  



모든 규범의 기준이 각자가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사회가 합의한 것을 ‘규범’이라고 불렀다면, 이제는 각 개인에 따라 규범의 기준이 다르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나 할까.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며 그 자리에 이성을 놓으려 했으나 실패한 그들에겐 개인만이 남은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인 ‘억압적 구조의 해체’는 이를 위한 그럴듯한 핑계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더 나쁜 건, 해체를 주장하는 자에게 ‘비판의 권력’ 맛까지 보게 해준다는 점이다. 발언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우쭐해지는 포스트모더니즘. 그러나 해체의 끝까지 가면 어디까지 갈까? 바윗돌 깨뜨려 돌멩이, 돌덩이 깨뜨려 돌멩이... 모래알까지 가지 않을까?




우리의 앞날은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WHO 총회 기조 연설을 요청받았을 때 우리 나라의 방역 정신을 한 마디로 “모두를 위한 자유”라고 주창했다. 한국의 확진자 동선 추적이 개인 사생활 침해의 요소가 있다고 계속 서구로부터 비판받자, 연설쓰기에 참여한 우리나라 정책자들이 고심하여 만든 문구인 듯하다. 


하지만 난 그게 서구 사람들에게는 별 반향을 못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모두를 위한”이라는 표현은 억압자들이 자유를 빼앗아 가거나 세금 거둬갈 때 내세웠던 듣기 좋은 표현에 불과하다. 전체주의자들이 늘 하는 소리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다. ‘모두를 위해’라는 말에 대해 서양인들만큼 거부감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봉건제는 우리 자신의 힘(동학혁명)보다는 원수같은 외부 세력(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반 강제로 무너졌다. 그러기에 훼파된 민족의 정체성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지난 100여 년간 우리에게 ‘공동체’는 회복해야할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서양은 좀 다르다.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까지 걸린 몇 백 년의 기나긴 투쟁과, 자본주의를 좀 더 살만한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한 고심과 실험의 과정 - 예를 들어 공산주의, 나치 등 명분만은 너무나 훌륭했던 이상적 시스템 - 에서 수많은 개인들이 잡혀갔고 ‘모두를 위한’이라는 허울로 사라져 갔다. 


아래는 유전병자들을 없애기 위한 나찌의 선전선동 포스터이다.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러니 서양인들이 '모두를 위한 어쩌구' 하는 말에 어떻게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한 명의 유전 병자를 위해 국가는 매일 5,50마르크의 비용을 지불한다 - 그 5,50마르크는 한 건강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돈이다.” 게티 이미지.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역사를 돌이켜보니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아 성공적으로 다른 사회에까지 전파된 가치나 시스템은 네 가지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자본주의와 복지. 모두 그 바탕에는 개인이 있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한국의 성공적 방역은 한 편으로는 실력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의 진행양상을 모든 사람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문화적 거부감이 없었으며, 공동체를 위해 정부가 요청하는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파편화된 개인주의는 아직 만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전염병 없이 한 세대가 지나면 어떨까? 지금은 서양 사람들을 비웃지만, 몇 십 년이 지나면 “국가 네가 뭔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해?”라며 정부 정책을 판단할 때 합리성 보다는 자기중심으로 하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전통적 공동체는 해체된 지 오래고, 집단으로서의 어떤 운동도 90년대를 끝으로 마감했다고 봐야 한다. 2000년 이후 벌어진 캠페인이나 사회운동은 개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호소했던 경우가 호응이 높았다. 미국산쇠고기, 아동학대, 미투, 산재노동자 문제는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아픔에 호소한 것이다.   


이건 조금 우울한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결국 그들이 갔던 길을 걸어갈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가장 열심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정착시킨 나라니까 말이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거기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호감은 서양보다 더 크고 여전하다. ‘타자’였던 우리에게 ‘너도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서양의 유일한 사상이니까. ‘주변부’여서 억울했던 우리에게 ‘너네 가치도 중요해’라고 인정해준 새로운 사상이니까. 식민지였던 나라의 지식인이라면 도대체 반가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렇게 지식인과 문화생산자를 매료시킨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매력적인 사조가 사상 시장에 등장하기까지 앞으로도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공동체는 계속 해체될 것이며, 개인은 점점 더 파편화할 것이다. 하지만 바라기는, 우리 사회가 지금의 서양처럼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 가지 희망이라면 우리의 뼈 속에 새겨진 오랜 역사는 서양인들의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사람을 존중하는 근거가 더 있다. 그래서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도 좀 더 다양하다. 


난 유교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유교 덕분에 서양 사람들보다는 ‘사람다움’의 근거를 풍성하게 찾을 거리가 우리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이지 않은 자세는 대안적인 공동체를 찾는 실험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코로나19를 대하는 여러 나라를 보고 우리나라를 생각하며 건져 올린 희망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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