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랑이 끝난 사람에게도 한없이 슬픈 이별이었다
한 번 헤어졌던 커플이 같은 이유로 결별하는 것을 논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본 적이 있다.
영화 한 씬에서 빗속의 절규를 하는 남녀를 보며, 이입을 하거나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는 이별을 해 본 이들일 것이다.
우스운 건 한 명의 사람이라도 그 장면을 언제 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이 한심하게 보이기도, 한없이 자신의 얘기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헤어졌다. 정확하게는 연인과 더이상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고, 연인을 괴롭히는 직장 상사에 대해 험담하고, 자기 전 달콤한 인사를 나누는 행위들로부터 물러나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버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의 하루가 진심으로 궁금하지 않았다. 일상적이고 지독히 습관적인 형태를 띄었을 뿐.
나는 왜 그에게 이별을 고하지 못했을까?
내게 버림받는 그 사람을 보는 게 두려워서, 그저 그게 맞았다.
우리의 사랑은 나도 깨닫지 못하는 동안 갑을관계라고 하는 희한한 케이스에 갇혀 버렸다. 연인간 애정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자연스럽게 관계 속에 스며드는 잔인한 제도.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갑이었고, 그 사람이 을이었다.
싸우거나 토라진 날이면 그나마도 을에서 병, 병에서 정으로 한 단계씩 수직 하락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여과없이 볼 수 있었다.
‘먼저 잔다’는 말로 대화를 끊고 정말로 잠들어버린 나와는 달리 한 시간에 한 번 혹은 두 시간에 한 번 꼴로, 결국 해가 떠오르는 시간까지 내게 틈틈이 연락을 해 온 그를 다음날 눈을 떠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을 위해서는 끝내 내가 모질어져야 했다. 나의 의견에 따라 관계는 발전될 수도 내내 이 모양 이 꼴을 유지할 수도 결국은 종결될 수도 있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도무지 그게 안되는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이 되는 사실을 겁냈던 게 아니라 그저 그 사람에게 차갑게 굴다가 냉정하게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이 영 자신 없었던 것이다.
이 관계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울다가, 애원하다가, 무너지는 그 사람의 정면을 내가 볼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위인이 못 됐다.
그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아서, 하는 단편적인 것을 떠나서 한 때는 사랑했던 그 사람이 슬퍼하는 모습을 당장 보는 게 내가 슬플 것 같아서 였다. 결국엔 나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머뭇대는 사이에 그 사람의 속은 곪고, 찢기고, 덧나고, 조금 나은가 싶다가도 더 큰 상처가 얹혔다. 라고 했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목적지를 눌러놓은 엘리베이터를 계속 밖에서 잡아두고 있었다. 그 버튼을 눌러 놓은 것도 사실 나였으면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그만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나의 몸이 알고 있었는데도, 간사한 마음이 간절하게 도리질 친 것이다.
정말 끝인 거냐고. 더이상 그에게 기회가 없는 게 맞는 거냐고.
어떤 이유를 가졌든 이별은 슬프고 냉담하다.
뜨겁게 끓던 것에 대한 안녕, 두 사람만 아는, 우리가 잊으면 영원히 그 누구도 알지 못 할 일들에 대해 끝내 함구하겠다는 약속, 그런 것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사랑이 식었다고 한들 슬프지 않을 리가 있나.
그러나 우리의 사이에 시한부를 선고하는 입장에서,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플 내가 그 사람에게 눈물마저 보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건 너무나 염치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