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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Mar 24. 2021

뜨거운 것은 길다

계절의 경계가 차츰 더 희미해진다.


3월 말을 지나는 나는 오전이면 전기매트 속에서 꿈쩍도 하기 싫은 겨울을 지내다가.

점심을 먹고 공기가 나른해질 때 쯤이면 겉옷을 더는 입고 있을 수 없는 여름을 걷는다.


나는 여름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날이 더워질수록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악취와 타인의 살냄새.


음식물이 쉽게 부패하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금세 땀에 절어버리는 등.


더위를 많이 타고, 냄새에 유독 민감한 편인 내게 여름은 좋은 수식어와 동반될 수가 없었다.


지구온난화가 사계절을 잡아먹기 전, 나는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왠지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계절이라? 내가 떠다니던 가장 작은 바다의 온도와 흡사해서?


그런데 작년부터는 생전 처음으로 여름이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코로나 시대.


그리운 얼굴들이 한없이 더 그리워지는 쓸쓸한 시대.


나는 하릴없이 그들에게 연락을 하거나, 어렵게 밥 약속을 잡는 대신 내면의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인생을 관통하던 어느 날의 연인들도 차례로 떠오르곤 했다.


이제는 잊혀져서, 굳이 들여다 보지 않으면 모를.


하루를 지내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내 복숭아뼈처럼, 맞다. 그런 기억이 있었지 하고 떠오르는 잔상들.


조마조마하고 울렁울렁하던 순간에.

가슴 뛰는 날들과 치열하게 싸우던 어느 날에.

나의 노골적인 연애와 간지러운 청춘 언저리에.

여름이 있었다.


모든 시간이 여름이었다.

사랑에 빠지고 보니 마음이 온통 더웠다.

자주 울게 됐었다.

비가 내린 땅처럼 종종 질척거렸다.

그 일련의 과정이 여름이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다가 올 여름은 얼마나 더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절은 돌고 또 돈다.


대한민국을 떠나 살지 않는 한 나는 1년에 두어번씩 여름옷과 겨울옷을 정리해야 한다.


지독하리만큼 더울 여름도 지나고보면 온통 반짝이는 추억만 남는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밤도, 샤워를 막 마치고 나왔음에도 금세 끈적끈적해지는 몸도.

다 바늘처럼 작은 일들이다.


여름밤 특유의 청량한 색감, 그 속에서 자유롭게 나부끼는 단어의 배열.

겨울보다 보폭이 커지는 계절에는 더 쉽게 나를 드러낼 수 있어진다.


초록색의 노래를 들으며 미지근한 칵테일을 향해 헤엄친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괜히 더 호의적인 태도를 한다.


품에 숨겼던 꽃 세 송이가 금세 숨 죽어버린다.

그 꽃이 시간에 마르는 동안 그 품에서 나던 꽃 향기를 떨쳐내지 않는다.


시원한 곳을 찾아 들어서면 금세 행복해진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고쳐 잡으며 웃는다.


그런 것들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뜨거운 것은 길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해처럼, 가장 연한 마음 벽에 찰싹 붙어 길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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