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작은 기억에 대하여
제가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압구정역에서 가까운 현대아파트 상가가 있습니다. 현대백화점을 지나 미성아파트 쪽으로 걸어내려 오다 보면 있는 상가인데, 신현대아파트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그 2층 상가는 건축한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뭐랄까요, 꽤나 운치 있는 건축물의 느낌이 납니다.
제가 중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후반, 그곳에는 "석기시대 소리방"이라고 하는 조금 특이한 이름을 가진 레코드 가게가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말이 별로 없는 안경 쓴 젊은 아저씨가 가게를 항상 보고 있었던 것을 보아 아마도 주인아저씨였던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그리고, 유행하는 가요나 팝의 테이프나 LP를 팔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던 록이나 프로그레시브 쪽 음반을 많이 가져다 놓고 진열하는 특색이 있어,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가게였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항상 일요일 예배를 마치면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그곳을 들르곤 했습니다. 그때 부모님은 저에게 매주 용돈으로 3천 원을 주셨는데 저는 떡볶이도 먹지 않고 버티다가 판을 한 장씩 사고는 했습니다. 당시 어지간한 라이선스 LP는 (가게에 따라 좀 달랐지만) 2천7백 원 또는 3천 원 정도 했었고, 테이프는 2천 원 정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EMI, WEA나 CBS 등 메이저 레이블의 직배가 들어오기 전이라서 주로 오아시스레코드, 지구레코드, 성음, 예음에서 라이선스 LP를 발매했었지요. 그리고 불법 해적판, 속칭 "빽판"은 2천5백 원 정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8백 원짜리 흑백 말고 나름대로 컬러 인쇄된 고급형 빽판 말이지요 ㅎㅎㅎㅎ
지겹디 지겨운 예배가 목사님의 "축도" - 두 손 들고.... 지어다...로 끝나는 그거 - 가 끝나고 나면 어린 저는 쏜살같이 예배당을 빠져나가 그 레코드 가게 앞에 서서, 진열된 신보를 구경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기껏 한 장 살 거면서 A부터 진열된 LP를 한 장씩 찬찬히 꺼내서 구경을 했습니다. 마치 표지와 노래를 다 외워버릴 듯이. 조그마한 꼬마가 들어와서는 한 시간도 넘게 판만 구경하고 앉았으니, 아마도 어지간한 가게 주인이라면 아마도 판이나 테이프를 훔치려는 것이 아닐까 의심도 했을 만합니다. 그런데, 석기시대 소리방의 주인아저씨는 한 번도 저에게 눈치를 주거나 이상한 아이로 취급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레코드를 매주 한 장씩만 살 수 있다면 그 선택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요즘 말로 '결정장애'가 있는 저로서는... 이 앨범은 어떤 평을 받고 있을까. 혹시나 이 밴드가 한물가거나 멤버가 바뀌고 나온 철 지난 앨범이 아닐까. 혹시 금지곡이 있는 건 아닐까. 친구들이 잘 샀다고 할까. 빌보드 차트에는 올라간 앨범일까... 온갖 고려요소들을 가지고 재다가 결국 한 장 고르면 거의 점심때가 되고야 맙니다.
그리고 검은색 비밀봉지에 넣어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마루 오디오의 턴테이블에 걸면, 그때만큼 행복한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 산 판의 비닐을 가위로 조심조심 자르고 벗길 때 나는 그 앨범 커버 화학처리 약품 냄새의 향긋함이란...
그때 샀던 판들은 많지만, 일일이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두 주 치 용돈을 모아서 이 앨범을 사가지고 온 날은 지금도 마치 어제처럼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성한 주일에 사탄의 음악 레코드나 사모으다니...
대학에 진학하고 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이 가게는 제 기억에서 저 멀리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제가 다시 이 동네로 돌아오게 된 십수 년 후에, 이미 이 가게는 없어졌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매체가 변하고, 자영업의 비즈니스 아이템도 변하고... 아마도 젠트리피케이션까지 가기도 전에, 이제 CD나 테이프를 팔아서 압구정동 상가 1층의 임대료를 내고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버거운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참 아쉽더라고요.
오늘 향뮤직(신촌 향음악사)의 폐업 포스팅이 올라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즐겨 방문하던 오프라인 가게는 아니지만, 오프라인 레코드 가게가 거의 없어진 후 그래도 온라인에서 CD로 앨범을 주문할 때 여기만 한 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일부 소수의 LP 마니아들을 위해 남아 있는 몇 군데의 오프라인 매장을 제외하고, 제대로 구성된 오프라인 레코드 가게는 이제 거의 종언을 고한 것 같습니다. 뭐랄까요. 씁쓸하다거나 아쉽다는 표현 말고, 제 어휘 구사력이 좀 더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http://hyangmusic.com/board/rvview.php?id=News&no=1199&page=1&s_key=&s_field=&ccate_name=
그래도, 어찌 되었든 음악의 유통 플랫폼은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고 발전되어 나갈 것이고,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 길에는 많은 장애물도 있고 더 혹독한 시련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예전 기억 속의 노래만 찾아들어도, 인생은 짧은 세월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지만, 조만간 다시 턴테이블에 판을 걸고 와인이나 한병 따야 되겠습니다.
P.S. 온라인으로 검색하면 석기시대 레이블 & 레코딩 스튜디오란 곳이 있습니다. 사실 나중에 CD 시대에 석기시대 소리방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때 주인아저씨가 저에게 "코스모스"라는 인디 밴드의 프로모션 시디를 한 장 공짜로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 꿈을 계속 좇으신 것 같고, 이 스튜디오는 석기시대 소리방의 후신인 것 같습니다.^^ 반갑네요.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