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이고 소심한 나에게 가장 읽기 어려운 텍스트는 사람이다. 사람 읽기에 너무 서툴러서 나도 모르게 타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사람 읽는 일은 과도한 계산과 생각과 감정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종이에 활자가 고정되어서 읽기 편한 책에 비하면 움직이고 변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은 읽기에 몹시 불편하다. 표정과 음성과 몸짓과 눈빛에는 자신의 말과 태도에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감정과 생각이 있다. 나는 표정과 목소리와 말투와 몸짓에서 나오는 의미를 해석하고 그 의미에 맞게 나의 말과 태도를 조정하려고 애쓴다. 그때 나의 신경과 뇌의 활동은 책을 읽을 때보다 더욱 복잡하고 활발할 것이다. 사람을 만나 쩔쩔매게 될 내 태도와 마음을 관찰하는 일은 번거롭고 난감하다.”
김기택,「잡생각에 대한 잡생각」, 『현대문학』 2020년 1월 호
인류의 얼굴은 진화의 산물이다. 식문화와 기후 그리고 공동생활로 인해 점차 바뀌어왔다. 다른 종과 달리 인간은 얼굴로 여러 감정을 드러내며 복잡하고 미묘하게 의사소통한다. 얼굴은 사회적인 텍스트다. 다양한 가면이다. 마음을 드러냈다가 숨길 수도 있는 블라인드 창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상대를 읽으면서 동시에 내가 읽히는 일이다. 우리 선조인 다산은 자식에게 얼굴빛을 가꾸라고 꾸짖기까지 했다. 얼굴이란 그런 것이다.
반면 등은 얼굴과 상반된다. 등에도 표정은 있으나 그것은 당장 읽을 수 없는 텍스트로 남아 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으면 나는 누군가의 등에 손을 얹으려는 것 같다고 느낀다. 사람의 등보다 널찍하다만 내게는 그렇다. 문은 안팎이 나뉘는 지점에 있다. 그 경계를 건너면 이전과 다른 공간이 나온다.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그 공간에 잠시 담겨있겠다는 뜻이며, 이전과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내가 바라보는 등도 그렇다. 갈고리처럼 휜 등. 어깨가 앞으로 말려 있는 등. 소녀나 소년에 머무른 것처럼 왜소한 등. 크고 평평한 바위 같은 등. 한밤중 도서관 문을 열고 나가면 곁을 나눈 사람의 등을 종종 떠올린다. 함부로 열 수 없는 문이지만 조심스레 손 얹어보고 싶다. 귀 한쪽 갖다 대어 안쪽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사물과 사건에도 등이 있다고 느낀다. 버려진 것, 쓸모없는 것, 먼지 쌓인 것을 보면 그것의 등이 보고 싶다.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니, 내가 들을 수 있을까?'하고 묻는다. 허락 받고 그들의 안쪽에 담겨 있고 싶다. 이야기를 듣고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정의 하나로 세계를 지나가는 건 캄캄한 터널을 혼자 통과하는 일일 것 같다.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의 입구로 걸어 들어간다. 그 첫걸음부터 나의 시 쓰기는 시작한다. 그동안 쌓아온 듣기와 보기의 소산으로 웅크리고 있을 등을 찾아 헤맨다. 넘어지고 또 나뒹군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천 번? 만 번? 백만 번? 틀렸어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출연한 김용택 시인의 대사―
‘진짜로 보는 게’ 내게는 등을 보는 거다. 이번 시에서 다음 시로 넘어가는 일은 등에서 또 다른 등을 마주하는 일이다. 어찌할 수 없는 텍스트를 읽어보려 하는 일은 매번 진이 빠진다. 늘 공부가 부족하다. 한편으로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를 떠올린다. 아직 너도 나도 서로에게 길들여지지 않았구나. 그렇게 차분히 기다리며 등을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문을 서서히 열어줄 때가 있다. 등에 손 얹으면 뒤돌아봐줄 때가 있다. 보잘것없던 비누가 보석으로 다가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