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새벽에 걸려온 전화
이문재 시인
“슬퍼서 전화했다. 가장 슬픈 일은 장소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에 가도 그곳을 찾을 수 없다. 너는 어디 가지 말아라. 어디 가지 말고 종로 청진옥으로 와라. 지금 와라.”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 실린 글이에요. 찾아보니 청진옥은 1937년부터 열어온 해장국집이더라고요. 요즘은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을 보기 힘든 것 같아요. 돈의 힘 아래에서 쉽고 빠르게 변하고 있죠. 식당, 카페, 술집, 옷집이 다른 가게나 빈 상가가 되어 있죠. 오래된 주택은 허물어지고 원룸 단지나 아파트가 들어서고요.
특히 자라온 곳의 풍경이 변하면 마음이 어수선해지더라고요.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한창 뛰어놀 때 6~7년 정도를 경남 김해에서 보냈어요. 당시 막 개발한 터라 반은 논밭이고 반은 신축 건물이 들어서는 풍경이었어요. 포장 도로에 트랙터가 오다녔어요. 제가 사는 곳은 아파트였지만, 여름밤 거실에서 잠들면 논밭의 개구리 울음이 한가득 들어왔지요.
천가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어요. 하교하고서 친구들이랑 물수제비하고, 발을 담그기도 했지요. 송사리, 개구리, 다슬기를 잡기도 했어요. 여름에는 친구를 모아서 물놀이를 했지요. 속이 답답한 날에는 혼자 그곳으로 나갔어요. 햇볕과 바람결 맞는 게 좋았지요. 물소리가 찰랑찰랑 귓속으로 들어왔지요. 눈 감은 채 보이는 햇살의 황금색.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피부로 느껴지는 햇볕의 따뜻한 기운. 되돌아보면 특별한 공간이에요. 다양한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니까요.
어느 날 김해에서 부산으로 돌아갔어요. 이부자리에 누우면 끝난 대국을 복기하듯 머릿속으로 오간 길을 서성였지요. 풍경과 친구들을 재생했다가 되감기를 닳도록 반복했지요. 너무나 생생해서 직접 확인해야만 할 때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갔어요. 천가는 오염되었더군요. 악취가 났습니다.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어요. 속상했죠. 내가 아끼는 공간이 변해버린 것. 장소만 해도 그런데 다른 것은 얼마나 빠르게 변할까요. 가족, 마음, 유행, 인기, 전자기기, 직업, 목표...
여러분은 그런 것 없나요? 앞서 나온 이문재 시인이 박준 시인에게 한 말처럼, ‘너는 어디 가지 말아라’ 하고 곁에 두고 싶은 것이요. 먼지 쌓이는 것에 ‘호호’하고 입김을 부는 것이요. 변하는 세상에서 제가 아껴두고픈 것을 말씀드릴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