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가 일어나는 공간 Affordance in SPACE 1
유럽이나 미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보면 부러운 것이 있다. 오래된 건축물에서 느끼는 감동이나 도심의 빽빽한 고층 빌딩 숲의 세련됨보다 실은 그 사이사이 쉴 수 있는 공원과 공간들이 많다는 점이다.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 맨해튼, 30×13미터의 120평도 안 되는 자그마한 자투리땅에 위치한 최초의 포켓 파크인 Paley Park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다. 다소 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도시공원 중 하나로 불리는 곳이다. 포켓 파크(Pocket Park)는 일반 대중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을 말한다. 주로 도시나 마을의 길모퉁이,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 보행 공간 그 외 자투리땅에 조성한다. 도시 사람들의 삶에 꼭 필요한 도심 속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Paley Park는 바람이 잘 통하는 나무, 가벼운 가구 및 단순한 공간 구성으로 되어 있다. 분당 6,800리터의 용량을 가진 6.1m 높이의 폭포가 공원 뒤편 전체에 걸쳐 있다. 공원은 3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4면이 거리를 마주보고 있는 거리(장식용 문이 있음)로 개방되어 있다. 벽은 담쟁이덩굴로 덮여 있고 베르토리아 사이드체어(Harry Bertoia per Knoll, Bertoia Side Chair, 1952)가 설치되어 있다. Paley Park는 William S. Paley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Paley가 그의 아버지 Samuel Paley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입구 근처의 명판에는 "이 공원은 대중의 즐거움을 위해 Samuel Paley(1875-1963)를 기리기 위해 따로 마련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놀라운 점은 이 공원이 1967년에 개장을 했다는 점이고 그 후로 뉴욕시의 모든 개인이 소유한 공공 공간의 진정한 모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사적 공공 공간의 원형이 구축된 것이다.
폭포는 도심의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고 작은 음이온을 생성할 수 있고 교통 체증으로 인해 발생하는 음향 소음을 억제할 수 있는 '회색 소음(Grey Noise)'을 제공하고 있다. 공원은 휴식을 취하거나, 저녁을 먹거나, 책을 읽거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사용되는 장소가 되고 있다. 특히 교통량이 많은 지역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실제로 음향 공해의 영향을 덮고 평온함을 조성하고 있다. Paley Park는 도시의 환경 개선과 시민들의 활발한 사회활동 등으로 포켓 파크의 효과를 증명했고,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공공장소 중 하나로 종종 꼽히면서 이후 다양한 포켓 파크를 양산하는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원통 형태의 마치 우물을 연상시키는 중정이 나오고 그 반대편에는 백송터가 보이는 건물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지만 태풍을 맞아 고사를 한 후 남은 둥치와 새로 심은 백송이 백송터를 지키고 있는데, 이 건물의 건축주는 백송터를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형태의 건물이 지어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건축을 맡은 SoA는 백송터와 자연스럽게 이어진 중정을 품은, 벽돌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 브릭웰(brickwell)을 설계하였다. 대지면적이 560㎡(175.5평) 불과한 4층의 작은 건물이지만 도로와 연결된 1층의 필로티 공간에 주차장을 비우고 중정에는 정원을 만들어서 누구나 들어와 거닐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 중정이 공공 정원으로 기능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흔히 사적인 조경 공간을 정원, 공적인 조경 공간을 공원이라고 부르는데, 브릭웰이 이 중간 영역에 있도록 한 것이다. 브릭웰은 지금 그라운드 시소의 전시공간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서 방문객이 많아진 탓인지 아쉽게도 정원 내부는 통행을 통제하고 벤치 하나 없는 관상용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적어도 내부의 구조보다는 비워진 외부 중정 공간이 더 알려져,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중정의 사진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보통 새로운 건축을 하게 되면 건축주의 입장에선 법적 건폐율과 용적률 내에서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길 원한다. 도심의 땅값이 높다 보니 최대한 주차면적을 확보하고 싶고 관리 차원에서라도 외부와는 단절된 사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할 수밖에 없다. 오픈된 공간이라도 층계나 문을 설치해서 외부와 경계를 만드는 것이 일반 적이다. 특히 브릭웰의 땅의 경우 골목과 골목 사이에 위치한 관계로 건물이 막고 있다면 사람들의 통행은 골목 끝으로 돌아서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겪을 것이다. 건축주가 욕심을 조금 덜어내고 사유의 공간을 공공이 이용할 수 있게 해서, 골목 사이의 숨통이 생기고 자연스러운 통행이 생기며 백송터와 연결된 멋진 포켓 공원이 만들어져서, 결국 고즈넉한 서촌의 좁은 골목길에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사유의 공간을 채우지 않고 비움으로 인해 공공의 공간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례로 한남동의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가 있다. 현대카드가 애초에 기획한 것은 소규모 클래식 공연장이었다. 초기 건축가는 프리츠커 건축상 수상자이기도 한 세지마 가즈요였다. 그가 제안한 건축물은 사방이 완전히 투명한 4층짜리 유리 건물이었고 공연장은 지하에 배치됐다. 건물이 투명해야 하는 이유는 이태원의 건물들이 남산의 허리를 막고 있어 뮤직 라이브러리만이라도 숨통을 터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사정상 설계안대로 진행을 하지는 못했고 현대카드의 정태영 부회장이 외국인임에도 남산의 가치를 알아본 세지마의 설계에 감사를 표하고 언젠가 원래 디자인으로 재공사할 수 있도록 기반 시설, 지하 등 주요 시공은 모두 원안을 따르고 외부 시설만 대중음악에 어울리도록 설계와 용도를 변경했다. 최문규 건축가와 겐슬러(공간 디자인)에게 맡겨 건물의 절반가량을 과감히 비운 시도를 이어나갔다. 그런 결과로 뮤직 라이브러리는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건물에서 가장 활용도가 높은 지상의 절반가량이 텅 비어있고, 원래부터 완만한 경사를 이루던 바닥이 그대로 남아있다.
뮤직 라이브러리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면성(파사드)을 갖지 않고 대신 거대한 지붕 프레임으로 비어있는 공간, 보이드를 마련했다. 창문처럼 뻥 뚫린 여백은 남산과 한강 등 서울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양쪽 시공간을 선사한다. 다중이용시설의 경우 의무적으로 비워야 하는 대지의 면적을 땅의 절반까지 늘린 공간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행위, 도시적 활력을 담을 수 있게 하였다. 현대카드의 많은 라이브러리들, 디자인 트래블 쿠킹 라이브러리들이 모두 멤버십 라운지라서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오직 이곳만은 심리적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문지방을 없애고 내부가 잘 보이게 투명한 저철분 유리를 사용해서 안팎으로 시선이 넘나 들도록 했다. 특히 거대한 규모의 벽화는 초기 JR의 롤링스톤스 공연 장면 촬영 사진에서 2021년 초에 알렉스 프래거 사진작가의 작품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벽화가 내부를 감싸는 분위기는 건물 자체가 하나의 설치 작품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지하에 설계된 공연장이 꽉 차 있는 것이라면 지상의 뮤직 라이브러리이자 ‘도시의 틈’은 도시에 대한 관심과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로 계획된 것이다. 길을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들에게 새로운 풍경을 선사하고 연중 다양한 모습과 기능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태원에서 한남동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에서 보이는 다양한 건물들 사이로 막혀있는 시선은 이 비워진 공간을 만나 비로소 트이고 한남동의 지붕들이 눈 아래에 펼쳐지는 뷰를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을 하고 있다.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는 건축물이 도시 속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이와 함께 열린 공공 공간을 만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한다.
도시는 언제나 옛 건물과 새로운 건물, 구 시가지와 새로운 개발지, 외부와 내부, 부분과 전체가 공존하고 공생하면서 마치 유기체와 같이 성장한다. 일상의 공간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이들의 조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고 지속되어야 한다. 건물과 건물, 외부와 내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공간에 관계의 의미를 더한다면 유기적인 도시의 다채로운 공간들이 상생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모든 건물들이 사유공간 내의 채움보다 어느 정도 비움을 통해 공공공간으로 유도 함으로써 동네의 가치가 바뀔 수 있고 그로 인한 라이프 스타일이 더 풍요로워 질 수 있다. 공존의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PALEY PARK design with water / a case history
도시에 맞는 새로운 녹지공간 해결책. 스토리텔러가 된 포켓 파크 _fromA
[건축과 도시] 통의동 브릭웰 '골목·안과 밖 연결하는 도심 속 작은 정원'
도심 속 비밀의 우물 브릭웰 _서울 MADE 11호 SPACE
잃어버린 도시 속 사이공간 _라펜트, 글 이훈길 논설주간(ㄱ_studio 대표)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_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 글 남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