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가 일어나는 공간 Affordance in SPACE 4
영국 SF시리즈 Black Mirror(블랙미러 @넷플릭스)의 에피소드 중 'Smithereens(스미더린)'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스미더린이란 뜻은 산산조각, 작은 파편이란 뜻으로 극 중에는 페이스북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소셜미디어 서비스 이름이며 중의적인 의미로 소셜미디어 중독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는 인간과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 스미스는 스미더린의 직원을 차량공유 기사로 위장하여 납치를 벌인다. 스미스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스미더린 회사의 CEO인 빌리 바우어와 직접 연락을 원하는 것이었다. 극 중 내용은 생략을 하고 그는 우여곡절의 인질극 끝에 결국 빌리 바우어와 연결이 된다.
빌리 바우어가 등장하는 장면이 드라마틱한데, 그는 장발의 수행자의 모습으로 미국 유타주에 있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외부와 통신을 끊은 채 묵언 수행을 하고 있었다.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서 디지털 디톡스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그의 신신당부로 회사 직원들이 묵언수행에 방해될까 봐 연결을 못했던 것이다. 직원은 위성 핸드폰을 가지고 그의 묵언수행을 방해하고 결국 연결을 시킨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자신이 만든 소셜미디어에 몰아넣고 정작 빌리 바우어는 모든 사람들과 단절된 공간에서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리트릿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제 이 장소는 La Casa del Desierto(라 카사 델 데시에르토)로 스페인 그라나다의 고라페에 위치하고 있다. 고라페 사막의 온도 범위가 여름 최대 45ºC에서 겨울에는 -10ºC까지 내려가는 지역으로 혹독한 기상 조건을 견딜 수 있는 유리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하는데 면적이 20㎡ 에 침실, 욕실, 거실 겸 주방으로 레이아웃 되어 있다. 태양광 패널로 전원 공급을 한다고 하는데 이 작은 6평도 안 되는 공간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어서 극 중에 고립된 상태에서 리트릿을 하기 적합한 장소로 촬영 로케이션 되었을 것이다. 디톡스 리트릿을 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의 고립된 환경이어야 할까?
애플 워치에 코로나 팬더믹 이후 '마음챙기기'란 알람이 생겼다. '성찰'이라는 메뉴를 선택하면 여러 종류의 안내 메시지가 나오는데 그중에 "때로는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마음이 가는 대로 놔두세요." 시작 버튼을 누르면 1분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챙기기를 해준다. 디지털기기를 만드는 애플도 하루에서 잠시라도 스마트폰에 눈을 떼고 디지털 디톡스를 권하는 것이 아닐까? 디지털 디톡스는 인터넷 중독과 스마트 기기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불안 및 스트레스를 경감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고 한다.
실은 우리는 심지어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숨을 인식하면서 숨을 쉬고 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는가? 명상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자신의 숨에 대한 들숨과 날숨에 대한 인식이다. 요가도 Inhale(숨을 들이마시고), Exhale(숨을 내쉬다)에 맞춰 숨을 의식하면서 요가를 시작하고 아사나(요가자세)를 할 때 중요한 절차이기도 하다. 매일 5분 정도의 명상만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간단히 집에서도 방 안에 앉아서 눈을 감고 할 수도 있고, 경험상 주변의 자연(공원, 산, 바다, 여행지 어디라도 좋다)에서 하는 명상은 일상의 스트레스 수치를 효과적으로 내려 준다.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작은 휴식처들이 대부분 자연과 최대한 가깝게 머무르는 것을 중요시하며 리트릿(Retrea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리트릿이란 최근 힐링의 또 다른 이름으로 "싸움이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소나 사람으로부터 떠나다", "후퇴 잠시 뒤로 물러나 휴식을 하며 재충전" 또는"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이야기한다. 교회 수련회를 리트릿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명상, 요가 스튜디오에서 리트릿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에 머무르며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하기 어려운 다른 일에 집중하는 의미일 수 있다.
료안지(龍安寺)는 일본 교토시에 위치한 선종 사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고도 교토의 문화재 중 하나이다. 동서 25m, 남북 10m의 장방형 정원으로 흰모래와 15개의 돌, 이끼로 만든 '카레산스이' 양식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카레산스이란 연못이나 수목 등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만으로 꾸미는 정원 양식이다. 모래는 바다나 호수 등 물을 상징하고, 돌은 섬, 산을 뜻한다. 15개의 돌은 어디서 바라보아도 한 개는 반드시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선(禪)의 뜻을 명상(meditation)으로 번역하고, 일본식 발음을 따라 젠(Zen)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선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철학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료안지의 정원은 선 명상의 원리인 단순성과 조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Zen Garden이라고 부르며 동양 선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마루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면 돌들에게서 설교를 받는 느낌이랄까 마치 긴 시간 명상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사원이 1450년에 지어졌다는데 암석정원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설계했는지 또는 디자이너의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570년 전에 기획된 공간이 현재에도 이어져 리트릿 공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수(水)·풍(風)·석(石)뮤지엄은 제주도 비오토피아 단지 내의 뮤지엄이다. 미술품이 전시된 일반적인 곳이 아닌 제주의 자연 물, 바람, 돌을 테마로 자연 속에 어우러져 '명상의 공간으로서의 뮤지엄'을 제시하고 있다. 설계를 한 이타미 준은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방주교회’ 등 시간의 결이 담긴 건축물로 대중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건축가로 재일 한국인으로서 유동룡이라는 이름 대신 ‘자유로운 국제인으로서 건축가가 되자’라는 마음으로 이타미 준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완전하게 속할 수 없었던 경계인으로서 이타미 준의 삶과 건축은 그래서인지 더욱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공간으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디아스포라 건축가로 남아있다.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면 수풍석 뮤지엄을 만들게 된 일화가 나온다. 재일교포인 도시락 업계에 크게 성공한 김홍주 회장이 일본에서 알만한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들을 일일이 직접 돌아보고 이타미 준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일교포인지는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김 회장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비오토피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교감했다. 좋은 공간에 대한 건축주와 건축가의 의지와 철학은 작품으로 녹아들었다. 비오토피아 완공 이후 부지 내의 뮤지엄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이타미 준은 인위적인 수집이 필요 없는 제주도를 대표로 하는 소재인 돌, 바람, 물을 테마로 자연을 전시하는 것을 제안한다. 약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던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이타미 준의 콘셉트를 샀다고 한다. 훌륭한 건축가의 작품은 분명히 그를 알아보는 훌륭한 건축주에서 나온다.
그렇게 시작된 뮤지엄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여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수풍석 뮤지엄 자체가 자연과 교감하는 힐링 공간으로 자연에 묻혀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내부에서 느끼는 강한 감동은 안도다다오와의 건축물과는 반대편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형이상학적 소재에 대한 해석 능력 즉 바람, 물, 빛, 시간 등을 어떻게 건축에 적용하고 그 공간에서 어떻게 자연 교감을 하는지에 대한 무한 감동을 받게 된다. 수풍석 뮤지엄에서는 내부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과 빛을 통한 시간의 변화, 특히 수 뮤지엄(표지 사진)에서는 더 나아가 우주를 느끼게 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뮤지엄 산은 건축가 안도다다오와 함께 뮤지엄 산 건축 철학인 ‘살아갈 힘을 되찾는 장소’를 재고하면서 이를 집약시킨 ‘명상관’을 만들었다. 뮤지엄 산의 공간과 자연, 예술이 전하는 영감과 여유로움으로부터 나를 돌아보는 정신적인 휴식, 명상을 제안하고자 했다는데 명상관은 40평 면적의 돔 공간으로 내부는 유리창을 통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풍경을 담아내었다. 명상관의 명상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돔 공간 내부는 마치 경주의 작은 왕릉 내부와 같았다. 주변으로 둥그렇게 매트를 깔아 놓고 누워서 명상을 하게 했는데 편안한 느낌에 코를 골며 잠이 드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요가에서 '사바아사나'라는 자세가 있는데 '송장 자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치 죽어서 무덤 안에 안장되어 편안히 누워 사후를 경험하는 느낌이랄까? 디지털 디톡스를 왕릉안의 공간에서 누리는 사치스러운 경험이다. 바쁜 삶을 살아가다 잠시 숨표를 만나 핸드폰 없이 오로지 나에게 주는 진정한 휴식과 충전을 경험하게 해 준다.
뮤지엄 산에서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제임스 터렐 전시관이다.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와 호라이즌룸(Horizon room)은 사색과 명상을 위한 공간으로 오직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진행되는 Colorful Night을 통해 일반 관람과 또 다른 45분간의 특별한 감상을 즐길 수 있다. 작가의 인공조명과 자연 하늘빛의 조화 속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엔 환상적인 빛의 향연이 시작된다." 뮤지엄 산의 안내 글 그대로이다. 해가 질 녘에 시작되는 누워서도 감상할 수 있는 이 장엄한 우주 쇼는 절대 사전에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장관이 작은 공간에서 벌어진다. 인생에서 꼭 경험해봐야 하는 버킷 리스트 일 순위에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소개한 모든 공간들은 리트릿을 위해서 가는 공간보다는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리트릿이 되게 만드는 특별한 공간들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공간들이 꼭 필요하다. 특히 도심에서는 작은 공간이라도 이런 탈출구를 제공하는 공간이 일반 사람들에게 제공될 수 있다면 공공의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할 것이다. 예전 도쿄 건축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어느 분의 집을 들려서 구경을 하는 드물고 소중한 경험이 있었다. 도쿄의 땅값이 비싸기 때문에 집 내부 구조가 복잡할 정도로 미로같이 밀도 있는 설계로 건축이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만 하는 아주 작은 공간으로 밖의 정원이 작은 창을 통해 보이고 혼자 겨우 들어가서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소중한 공간이며 그 집에서 가장 부럽고 집을 만든다면 꼭 가지고 싶은 공간이었다.
"Smithereens" Official Trailer
“La Casa del Desierto” featured in the fifth season of Black Mirror series
명상관 Meditation Hall, ‘나를 발견하는 여행’
살아있는 건축, ‘이타미 준’의 제주도 수(水)∙풍(風)∙석(石) 박물관
감독 정다운, 다큐멘터리 <이타미준의 바다>(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