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높은 곳에서 아 시원하다 하는 사람과 떨어지면 정말 아프겠지 하는 사람.
나는 후자. 늘 사고의 순간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그렇게 하면 살 방법을 알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영화(혹은 소설) <원데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바구니 자전거를 타고 가다 도로에 드러눕게 되는 상상 또한 안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차마 빠르게 갈 수가 없다.
하지만 때로는 적당한 속도를 내 줘야 폐를 끼치지 않는다.
처음 로드바이크로 한강변을 따라 45km를 달렸던 날 사진 한 장을 남기지 못했다. 첫 스쿠버다이빙 때처럼 생존에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풍경을 감상할 틈이 없었다. 온갖 사람과 차, 심지어 비둘기까지 내게 달려드는 것 같고 나를 태운 기계는 아직 내 몸이 아니고 '쉭쉭' 나를 스치는 다른 자전거 소리에는 말 그대로 참호에 숨고싶은 기분.
겁도 많고 호기심도 그만큼 많은 자의 비애다. 그치만 언제나 손에 땀을 쥐고도 롤러코스터를 타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결국엔 시원하고 짜릿하기 때문이다.
오늘 4월3일엔 두 번의 자전거를 탔다. 요가를 하러갈 때 바구니자전거를, 반포대교를 왕복할 때는 로드바이크를.
요가 끝나고 오늘 길엔 거의 인도로 온다. 어린이시민이 엄마 손을 잡고 걸었다. 가다 서다 볼 게 많았다.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꽃은 머리 위에만 아니라 바닥에도 핀다. 어린이 시민은 보도블럭 사이에 핀 보라색 꽃을 보았다. '엄마, 불 수 있는 거야?' '꽃이 지고 씨가 나야 그 때 후, 불 수가 있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는 숨을 죽이고, 안장 위에서 곡예를 하듯 조용히 그들 뒤를 따라갔다. 잠시만 비켜주세요 하고 싶지 않았다. 실은 내리는게 더 좋았을것이다.
로드바이크를 타자 추월, 추월만이 생명이었다. 흐름을 맞추지 않으면 사고유발자가 된다. 동행은 머뭇거리는 나에게 계속해서 소리쳤다. "지금이야, 속도를 내자!"
나란히 따릉이를 타고 속닥이는 커플은 길을 막는다. 어떤 사람들은 목숨이 두 개인 양, 에어팟으로 통화를 하면서 자전거도로 가운데를 걷는다. 손을 잡고 도로를 점유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아 나는너무 무서운데 세상은 왜이렇게 간 큰 사람들 천지야" 하고 소리내어 말한다. 바람소리에 가려 내 목소리가좀 작게 들린다. 아마 운전하면 누구보다 많이 욕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냥 쌩 하고 지나가지 않고 "지나갑니다!" 말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그래서 나도 그 말을 하며 지나간다. "지나가요~" "지나갈게여~" "지나갑니다아~" 초보를 잘좀 봐달라는 불순한 의도를 담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부끄럽다. 떼어내고 싶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갈짓자로 가는 어린이들을 지날 때는 어른인 양 "지나갑니다!" 하고 말하면 기분이 좋다. 시민 답게 알아 듣고 자전거 위에서 몸가짐을 다시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럼 나는 존중하고 또 존중받은 기분이 된다.
자전거에 오르는 순간 나는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 겁에 질려 떨고 있다 할 지라도, 차와 사람 사이에 껴서 서럽다 항변해봐야 보행자한텐 강자다.
안장 위에 있으면 그 사실을 자꾸 잊게 된다.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안장에서 내리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억지처럼 느껴진다. 길은 좁고 바퀴는 구르는데 앞길을 막는 모든 것이 거슬린다. '나한테 좀 양보해 주면 안돼?' 물론, 보행자가 양보할 어떤 이유도 없다. 심지어 앞에 가는 사람은 대개 뒤에 자전거가오는 줄을 모른다.
어린이 시민도, 특별히 느린 사람도, 자전거를 잘 못 타는 사람도, 공평하게 길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잘 가고 빨리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장애물이 아니다. 가다 서다 가다 서다 유리벽 너머 가게를 구경하는 연인들은 그대로 그렇게 걸을 권리가 있다. 이 당연한 얘기를 안장 위에만 어찌 그리 잘 잊느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