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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젠 Oct 05. 2022

어쩌면 흔한 어머니와 딸

Mother Knows Best - 라푼젤(2010)

Mother knows best
엄만 다 알아
Listen to your mother
엄마 말을 좀 들으렴
It's a scary world out there
바깥세상은 위험하단다


숲 속의 탑에 갇힌 채 18세 생일을 맞이한 라푼젤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매년 자신의 생일 밤마다 하늘을 가득 수놓는 불빛을 직접 구경하는 것이다. 그 불빛은 사실 납치당한 라푼젤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국왕 부부가 날려 보낸 등불이지만, 18년 동안 탑에 갇혀 살았던 라푼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런 라푼젤에게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는 어머니 고델이 있다. 어머니에게 라푼젤은 용기를 내어 올해의 불빛을 직접 보러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고델은 창문과 커튼을 차례로 닫으며 라푼젤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려고 한다.




이른바 디즈니
리바이벌의 시작


2022년은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설립된 지 100년째가 되는 해다. 한 세기라는 세월 동안 디즈니가 항상 승승장구하는 건 아니었고, 이 회사가 겪었던 크고 작은 부침에 팬들은 ‘르네상스’, ‘다크 에이지(암흑 시대)’, ‘리바이벌(부활)’ 같은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다. 이 중 ‘디즈니 리바이벌’은 디즈니가 2000년대 초중반까지 겪었던 부진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3D 애니메이션들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를 일컫는다.


막시무스, 라푼젤, 플린


[라푼젤]은 [볼트], [공주와 개구리]와 함께 ‘디즈니 리바이벌’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디즈니의 5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라푼젤]의 제작에는 약 2억 6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갔다. 이 글이 쓰인 2022년 말까지도 [라푼젤]의 제작비를 뛰어넘은 애니메이션 영화는 아직 없다.


이 천문학적인 액수 중 정확히 얼마큼이 라푼젤의 머릿결을 만드는 데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푼젤이 플린과 함께 물이 차오르는 동굴 속에 갇혔다가 머리카락에 빛을 불어넣는 장면이나, [아이 씨 더 라이트 I See The Light]가 나오는 등불 씬 등을 보면, 이 독보적인 비주얼을 위해 많은 연구와 노력을 들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하고 나서도 흥행 부진을 우려했는지, 디즈니는 남자아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원래 [라푼젤Rapunzel]이었던 제목을 보다 성별 중립적인 [탱글드Tangled]로 바꿨다.



물과 빛, 머리카락을 맛깔나게 버무린 시각예술적 성취에 비교하면 [라푼젤]의 음악들은 다소 무난한 편이다. 물론 무난함은 나쁨의 동의어가 아니다. 맨디 무어가 부른 라푼젤의 아이 원트 송 [웬 윌 마이 라이프 비긴When Will My Life Begin?]은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 잘 어울리는 밝고 유쾌한 포크 록이고, 라푼젤이 플린과 부르는 듀엣곡 [아이 씨 더 라이트I See The Light]는 두 가수의 감미로운 음색이 돋보이는 발라드이다. 그러나 이 곡들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 딱 주어진 역할만 해내도록 만들어졌고 그렇게 기능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선의와 악의 사이


그런데 라푼젤의 계모 고델에게 주어진 [마더 노우즈 베스트Mother Knows Best]는 조금 결이 다른 인상을 남긴다. [라푼젤]에서 유일한 ‘빌런’의 노래라는 점도 그렇지만, 다른 곡들과는 음악적인 스타일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독 바이런 하워드가 작곡가 앨런 멩컨에게 이 곡에 대해 전달했던 디렉션은 “옛날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의 곡이었는데, 멩컨은 그렇게 되면 [마더 노우즈 베스트]가 작품의 다른 곡들에 비해 너무 이질적인 곡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고 한다.


라푼젤과 고델


멩컨의 우려처럼 자칫 혼자 붕 뜰 수도 있었던 이 곡을 자연스럽게 작품의 일부로 봉합시키는 데는 고델 역의 배우 도나 머피의 연기가 큰 역할을 했다. 머피는 유명한 연극배우로, 연극 계의 오스카라고 불리는 토니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는지, 고델을 디자인한 애니메이터 김상진은 머피의 노래를 듣고 작업의 모티프를 떠올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1940년대 할리우드 여배우’라는 모티프다.


감독의 지시와 멩컨의 작곡, 머피의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탄생한 연극이라는 콘셉트는 고델의 캐릭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연극이 본질적으로 관객을 속이는 행위라고 한다면, 라푼젤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는 고델은 작중 내내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더 노우즈 베스트] 시퀀스가 시작되면 고델은 창문과 커튼을 닫고 불까지 꺼버린 뒤, 컴컴한 무대 위에서 바깥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단적인 예시와 과장된 몸짓으로 설명한다.



Ruffians, thugs, poison ivy, quicksand
깡패, 건달, 옻나무, 모래 수렁
Cannibals and snakes, the plague
식인종과 뱀, 전염병까지 있단다


식인종 운운에서 드러나듯 고델이 말하는 “바깥세상의 위험”에는 허구와 과장이 섞여 있다(물론 디즈니의 세계에는 진짜 식인종이 있을지 모른다). 해당 장면에서 시종일관 라푼젤에게 겁을 주고 놀라게 하는 것이 고델 본인이라는 점도 사실 진짜 위험은 고델이라는 암시로 읽힌다. 관객들은 대부분 원작 동화의 내용을 알고 있을뿐더러,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고델의 행적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가 라푼젤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관객들은 감정적인 동요를 겪기도 한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가끔 맹목적이 되며, 그로 인해 자식이 겪을 수 있는 비현실적으로 나쁜 일을 상상하기도 한다. 자식이 둥지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깥세상의 위험을 과장해 말할 수도 있다. 부모-자식 관계에 관련된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환기되면 관객들은 충분히 고델의 이 ‘연극’ 속에 일말의 진심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비록 머리카락을 이용하기 위해 납치하긴 했지만, 일종의 리마 증후군처럼 라푼젤을 데리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애정이 생기진 않았을까? 어디까지가 고델의 진의인지 쉽게 단정해버릴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이 노래는 입체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어쩌면 흔한
어머니와 딸


이런 어머니는 딸에게 ‘너를 평생 손에 쥐고 놓지 않을 테다’며 눈을 부릅뜨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너의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꿈의 시나리오대로 사는 것이 나의 분신인 너의 역할이자 운명이다, 라고.

-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마더 노우즈 베스트]의 위와 같은 입체성 덕분에, 종막에 드러나는 고델의 본색과 별개로 위의 장면만큼은 딸의 인생을 억압하는 어머니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딸이라는 모녀관계의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특별히 악한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어리석어지고 어리석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흔한 어머니와 딸의 관계.


이 점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령 고델이 라푼젤을 탑 안에 묶어놓기 위해 구사하는 전략들의 면면을 보자. 탑 바깥은 위험하다며 겁을 주고, 살이 찐 것 같다며 느닷없이 외모를 품평하더니(이 부분은 실제로 [라푼젤]의 여성 스태프들이 어머니에게 들은 말에서 따 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라푼젤을 가장 사랑하는 건 자신이라며 죄책감을 심는다. 심지어 후반부의 리프라이즈 버전에선 “플린이 너를 왜 좋아하겠냐”며 자존감에 못을 박는다.



어머니는 딸과 같은 성별이라는 점 덕분에 누구보다도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점 때문에 누구보다도 잔인하고 모진 사람이 되기도 한다. [라푼젤]의 원제 [탱글드Tangled]의 뜻처럼 얽히고설킨 이 복잡한 관계성에 천착하면, 라푼젤의 머리카락 없이 삶을 지속할 수 없는 고델의 모습에선 딸의 감정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위험한 어머니가 엿보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마법의 머리카락은 고델이 라푼젤을 감금한 이유였지만, 탑을 탈출한 이후로는 라푼젤이 스스로를 지키는 무기가 되는 한편, 소중한 사람을 치유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어쩌면 타인의 어리석음이 우리를 상처입힐 때, 가장 많이 아팠던 부분이 결국에는 우리를 더 강하고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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