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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젠 Oct 25. 2022

흑인 뮤즈는 무엇을 노래하나

The Gospel Truth - 헤라클레스(1997)


Though, honey, it may seem imposs'ble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자기야
That's the gospel truth
이건 틀림없는 진실이라구


신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길러졌고, 다시 신이 되려고 하는 청년 헤라클레스가 있다. 그는 숙부이자 죽음의 신인 하데스의 음모로 신성을 거의 잃었지만, '진정한 영웅'의 면모를 보이면 다시 올림푸스에 입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고난 괴력을 스승 필록테테스와의 맹훈련으로 더 단단하게 벼려낸 반인반신은 세계 곳곳에 도사리는 괴물과 야수들을 처치하고 일약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어째선지 올림푸스로 향하는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디즈니 흥행 열차가

잠시 정차한 곳


유년기에 히트를 쳤던 학습만화로 세대를 구분지을 수 있다면, 홍은영 작가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2000)]를 읽으며 자랐던 나는 '그로신(그리스 로마 신화) 세대'에 속한다. 말하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는 내가 생애 최초로 심취했던 세계관이었고 이는 '그로신'을 다룬 다른 콘텐츠들에 대한 선호로 이어졌다. 내가 디즈니 [헤라클레스]의 팬을 자처하는 것도 이 백그라운드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했던 1997년은 홍은영의 학습만화가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에는 [헤라클레스]에 영 흥미가 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헤라클레스]의 포스터를 보고 어린 마음에 떠올랐던 감상은 '애들 영화는 아닌 것 같다'는 거였다. 포스터의 한가운데에 보디빌더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근육질의 헤라클레스는 지나치게 마초적이어서 부담스러웠고, 그 옆의 요염한 메가라는 왠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은 조형이었다. 이걸 나만 느낀 건 아니었는지 당시 한 일간지의 기자는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착실하고 건전한 청년 헤라클레스가 요부에게 홀려 목숨을 잃을 뻔한다는 내용은 어린이에겐 다소 무리인 것처럼 보이고 7~8분에 한번씩 등장해 극의 흐름을 전하는 흑인여성 코러스의 율동 역시 상당히 선정적이다.


기자의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어린이가 주요 타겟인 상품에 대해 어린이가 뭔가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면 그건 분명한 적신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헤라클레스]는 [인어공주] 이후 8년간 이어졌던 디즈니 연쇄 흥행의 휴지기로 기록되었다. [헤라클레스]의 개봉 2주차 수익은 5,800만 달러로, [포카혼타스]의 동기간 수익 8천만 달러, [라이온 킹]의 1억 1,900만 달러와 비교하면 가까스로 중박을 친 수준이었다. 서울 관객 24만이라는 한국에서의 성적 역시 당대의 슈퍼스타 장동건과 이승연이 더빙을 맡았던 것을 감안하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현재 [헤라클레스]는 나를 포함한 디즈니 팬들에게 재평가되어야 하는 작품으로 종종 회자된다. 아동용 영화를 만들기 위해 원전 신화가 어쩔 수 없이 '순한 맛'으로 개조되긴 했지만 (헤라클레스가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나온 적자인 디즈니 버전과 달리, 원전 신화에서의 헤라클레스는 알크메네가 남편 암퓌트리온으로 변신한 제우스와 동침한 결과 나온 사생아이다) 이를 통해 만들어낸 극적 재미와 교훈은 나쁘지 않았고, 고대 그리스 미술 양식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보이는 캐릭터 디자인은 독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장르의 흥겨운 음악들과, 이를 파워풀한 보컬로 지탱하는 뮤즈들이 있다.




뮤즈와 가스펠의

매우 간략한 역사


뮤즈란 무엇인가. 뮤즈는 1994년 결성된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이다. 뮤즈는 (주로 남성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는 여성을 일컫는 관용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학문과 예술의 여신들이며, 그리스어로는 무사/무사이(복수형)로 불린다.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서 9명의 뮤즈를 언급했지만, 이 중 디즈니의 [헤라클레스]에 등장하는 것은 5명이다. 이들은 [헤라클레스]의 모든 삽입곡을 직접 부르거나 코러스로 참여하며,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화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피부는 모두 갈색이다.


[헤라클레스]의 뮤즈들


해당 장면의 색감이 조금 어두운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들의 캐릭터 디자인에는 너무도 명백한 인종적 특성이 들어가 있다. 작중에 등장하는 다른 신들의 디자인을 보면 상황은 더 명확해진다. 올림푸스의 여러 신들의 피부가 인간의 것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다양한 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레스는 빨강, 포세이돈은 파랑, 아프로디테는 분홍, 아테나는 보라색 등. 비중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 시각적 존재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이들이 인간과 구분되는 신성을 지녔음을 표현한 방식일 것이다.


올림푸스의 신들


다른 신들은 인외의 존재로서 알록달록하게 표현한 작품에서, 역시 학문과 예술의 신인 뮤즈들에게서 유독 특정 인종의 특징이 발견된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다. 이 관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흑인 뮤즈들이 노래를 부르며 선보이는 퍼포먼스의 양식, 그리고 이들이 부르는 첫번째 노래의 제목 [더 가스펠 트루스The Gospel Truth]이다.


극의 시작과 함께 흘러나오는 이 넘버는 작중의 신화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가스펠 트루스'는 해석하자면 '복음에 적힌 진실' 내지는 '절대적 진리'라는 뜻인데, 가사 내용에 주목하면 이 제목은 '제우스와 올림푸스에 얽힌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음악 장르인 가스펠과 관련이 있다.


[시스터 액트]의 한 장면


기독교의 찬양 음악인 가스펠에는 여러 분파가 있지만, 보편적으로 가스펠이라고 하면 흑인 커뮤니티에서 향유되어 온 블랙 가스펠을 일컫는다. 1992년 영화 [시스터 액트]가 잘 표현했듯, 콰이어 로브Choir robe를 입은 성가대원들이 발을 구르거나 손뼉을 치며 흥겹게 리드미컬한 곡을 부르는 광경이 흑인 가스펠 음악의 가장 잘 알려진 이미지이다. 오늘날의 가스펠은 힙합이나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기도 하며, 어떤 곡들은 가사를 빼놓고 보면 종교적 색채를 느끼기 힘들 정도로 음악적인 외연이 넓다.


가스펠은 힙합만큼이나 흑인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여기에는 미국의 노예 제도가 관련되어 있다. 낯선 대륙에서 비참하게 착취당했던 흑인들은 백인들의 문화였던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자신들의 맥락에 맞게 재해석했다.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는 압제자들의 종교였지만, 고통받는 자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으리라는 교리의 내용은 흑인들의 상황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남부의 노예들에게 있어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종종 노예 제도가 폐지된 북부로의 탈출과 동일시됐다. 이러한 재전유 과정에서 백인 크리스천들이 부르던 가스펠은 아프리카의 전통과 결합하며 새로운 음악 양식으로 거듭났다.


[헤라클레스]의 뮤즈들이 [더 가스펠 트루스]에서 제우스의 업적을 기리며 선보이는 역동적인 퍼포먼스와 보컬은 분명히 가스펠의 형식을 의도하고 있다. 서구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다룬 콘텐츠에서 이런 식으로 흑인과 흑인들의 문화가 재현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건 [인어공주] 실사판의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를 낙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의 결정이었을까? 즉 디즈니가 90년대부터 이미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고려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상업적 거짓과

복음적 진실


[주토피아]와 [모아나]를 필두로 디즈니가 다양성이라는 테마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 이후라면, 디즈니 작품 속에 나온 흑인 캐릭터를 보고 반사적으로 '정답!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외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기가 아직 90년대 중후반이라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기서 뮤즈들이 부르는 두 번째 넘버인 [제로 투 히어로Zero to Hero]를 보자. 이 곡은 괴물들을 무찌르고 스타덤에 오른 헤라클레스를 고대 그리스 버전의 마이클 조던으로 그리고 있다. 괴물과의 싸움은 관객을 동반한 스포츠 경기처럼 표현되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샌들(노골적인 나이키 에어 조던의 패러디이다)과 각종 굿즈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고대 그리스 청소년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 에어 허크


Herc was on a roll
허크는 승승장구 중이야
Person of the week in every Greek opinion poll  
인기 투표를 하면 항상 '이 주의 인물'로 뽑히지
What a pro  
이런 프로를 봤나
Herc could stop a show  
허크는 모두의 시선을 빼앗는다네
Point him at a monster and you're talking SRO
괴물과 싸우는 날엔 스탠딩석밖에 안 남아


고대 그리스의 영웅을 현대의 스포츠 스타처럼 그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허크'가 존재하는 그리스 역시 자본주의와 쇼 비즈니스가 만개한 현대의 미국 같은 공간이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세계를 진지하게 묘사할 생각이 없다. 그 대신 제작진은 헤라클레스가 [라이온 킹]의 스카 가죽을 뒤집어쓰게 한다든지, 그의 얼굴이 들어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를 보여주는 등 킬킬거리며 볼 수 있는 각종 패러디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작업에 집중한다.


필록테테스와 스카 가죽을 쓴 헤라클레스


이 맥락에서 흑인 뮤즈들의 가스펠은 문화적 다양성의 고려라기보다는, 그냥 현대 미국의 풍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소품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고대 그리스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 관객들에게 '이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야'라고 운을 떼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상업 예술이 이러한 서사 전략을 쓰는 것 자체를 얄팍하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다만 문제는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의 찬양 형식을 그리스 신화의 다신교 세계관으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하나님으로 대표되는 선과 사탄으로 대표되는 악의 대립을 바탕으로 한 이분법적 세계관을 전제하는데, 이 틀을 그리스 신화에 적용하면 어쩔 수 없이 선은 주신 제우스, 악은 하데스에게 할당된다. 뮤즈들이 주일 예배에서 본 것 같은 익숙한 양식으로 올림푸스의 주신 제우스를 찬양하면, 관객들의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데스가 사탄과 포개어지는 것이다.


디즈니의 하데스는 팬이 상당히 많은 빌런이다


그리스 신화로 디즈니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각색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감안해도, 이런 식으로 그리스 신화의 다신교적 맥락이 납작해진 것은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조금이라도 살펴본 사람은 아는 사실이겠지만 하데스는 악신이라기보다는 그냥 죽음을 관장하는 신, 혹은 죽음 그 자체일 뿐이다. 심지어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구절에서 '음부'에 해당하는 원문은 하데스(hades)인데, 이는 저승을 뜻한다. 성경에서도 하데스를 가치중립적인 죽음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원작의 본고장 그리스에서 흥행하지 못했던 것에도 이 안일한 각색의 지분이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는 흥미로운 작품이며, 이 글이 다루지 않은 관점에서 이야기할 거리도 풍부하다. 이 글이 쓰여진 2022년 말 기준으로 구체적인 실사화 계획이 잡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실사판의 캐스팅 정보가 하나둘씩 공개될 무렵이면 뮤즈의 인종 문제가 새로운 잡음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 디즈니의 실사화 프로젝트가 원작을 망쳐놓고 있다고 주장하는 '원작 팬'들이 #나의에리얼이아니야(#NotMyAriel)에 이어 #나의뮤즈가아니야 해시태그를 유행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흑인 뮤즈가 나의 뮤즈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1997년 작품이 아니라 기원전 700년에 쓰여진 [신통기]를 원작으로 가져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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