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불짜리 저녁 야경을 품은 성곽길 집에서의 일상 일탈.
"카톡"
카카오톡에 앙상한 살구나무에 몽실몽실한 핑크빛 꽃봉오리가 보이는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우와 살구꽃 너무 예쁩니다! 꽃잎 떨어지는 술잔에 술 마시고 싶네요. 바비큐랑."
"그래서 꼬시는 거죠. 그동안 고기 굽는 솜씨도 더 늘었고."
명륜동 성곽길 꼭대기 집에 살고 계신 멋진 부부를 만났습니다. 산자락에 찰싹 달라붙은 집. 언덕 위에 위치해서 공간은 크지 않지만 나름 4층 집입니다. 4층은 산을 병풍으로 삼고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 낸 살구나무가 멋지게 버티고 있는 도심정원을 품었습니다. '살구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바람이 불면 꽃잎이 술잔에 떨어지는데... 그 맛이 참 좋다'는 이야기에 반해 살구나무에 꽃피면 바비큐 파티를 열자고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친구 생일파티를 겸해 마련한 자리. 몇 주 전과 달리 산엔 봄기운이 완연하네요. 뒷산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이름 모르는 화초들이 여린 속살을 드러내며 울긋불긋 색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야외정원에서 서울 전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입니다. 이 집의 매력이죠. 컴컴한 밤. 왼쪽으로는 조명이 황금빛 길을 만들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곽길이 보입니다. 저 멀리 용문산에 위치한 군부대 즈음에서는 횃불처럼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정면으로는 낮은 동네 집들의 옥상을 거쳐 고층빌딩 숲을 지나면 강 건너 뭉툭하니 우뚝 선 롯데월드 건물이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남산타워가 언덕 위 집들에 가려 살짝 보입니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뜬 둥근달은 흩뿌려진 구름이 뿌옇게 가리려고 하네요. 어릴 적 이불을 뒤집어쓰고 봤던 TV [전설의 고향]처럼, 평상시와 다른 무언가가 벌어질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일상을 탈출한 이 날의 분위기에 딱 맞는 거지요.
4층 방 CD에 걸어 놓은 레이 찰스의 블루스 음악이 열린 창문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임을 고려해서 이야기는 조근조근 나눕니다. 그런데도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는 어찌해 볼 수가 없네요. 말소리와 음악소리, 고기 타는 소리, 아삭아삭한 김치를 씹는 소리가 어우러집니다. 공중에 메달아 놓은 화로에 숯불이 사그라지면서 나는 연기가 알싸한 공기 중에 피어오르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서울이 아닌 시골 어느 펜션에 온 것만 같습니다. 월요일 저녁 일상의 여유가 꿈만 같습니다.
퇴근 후 한 명씩 등장하는 사람들. 웬만한 건 미리 주문 배달을 했지만 계속 늘어나는 인원에 불발탄과 숯불이 모자라 늦게 오는 사람에게 사 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먹다 보니 이번엔 고기가 부족해 더 늦게 오는 사람에게 고기 좀 사 오라고 전화합니다. 처음 찾아가는 동네에서 정육점이 어디 있는지 알 리 없는 친구. 집 근처 식당에 들어가 두꺼운 삼겹살 6인분과 반찬까지 살뜰하게 챙겨 와 큰 박수를 받습니다.
생일을 맞은 사람, 집주인, 동네 주민, 친구의 친구들.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월요일 저녁의 여유로운 일탈을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생일을 핑계로, 살구나무 꽃 핀 걸 핑계로 모였습니다. 좋은 사람들이라 그런 걸까요? 어색함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의 재미가 모여서 하루가 행복해지는 걸까요?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