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사주팔자나 관상류의 짱팬이다. 오죽하면 이렇게 책까지 사서 읽을까.
관상에 대한 접근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이러한 접근은 관상이 과학이냐 미신이냐는 식의 논쟁으로 번지기 쉽다. 그러나 내가 관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믿음의 결과는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미래를 점치고자 한 인간의 고민은 이미 4,800여 년쯤 전에 중국의 복희 씨가 발명한 팔괘에서부터 드러난다. 점성술이니 관상이니 사주팔자니 하는 것은 모두 인생의 길흉을 미리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21세기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넓게 보았을 때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미래학자라든지, 트렌드 예측이니 미래 전략이니 하는 것까지도 포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을 거창하게 말해서는 인사이트, 혹은 통찰, 소소하게 말해서는 눈썰미의 영역으로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관상은 오롯이 인간에 대해서, 사람의 심상, 형상, 골상, 음성 등에 관심을 가지는 분야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어찌 보면 관상은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어떤 판단을 내렸는가의 집대성이다. 그 판단의 경험이 그 긴 세월에도 명맥의 끊김이 없이 꾸준한 관심을 받아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집단의 평균을 가정할 만한 증거가 되지 않을까. 마치 전래동화라든지 지역 별로 구전되어 온 이야기를 보면 그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내가 관상에 관심을 가지는 첫 번째 이유이다.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받는 인상과 그 사람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근거를 알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책의 '볼살' 부분에는 이러한 설명이 붙어 있다.
'볼살은 사랑받고 싶거나 어떤 사람과 적극적으로 교제하고 싶거나 사교 등의 의미가 있다. 볼살이 풍부하고 솟은 사람은 적극적이다.'
이것을 믿음의 문제로 가져가면 그럼 볼살 많은 사람은 다 성격이 똑같냐, 볼살 많은 사람 다 만나봤냐 와 같은 논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볼살이 많은 사람은 적극적이며 사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거나, 혹은 첫인상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을 적극적이거나 사교적일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가 그 사람의 볼살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기실 위는 일례를 든 것이고 볼살의 경우에도 입의 크기라든지 다른 것을 함께 고려하도록 되어있다. 요는, 사람은 어차피 외형으로 남을 판단하기 쉽다. 이왕이면 역사적으로 인류는 어떻게 판단해 왔는지도 알아 보고 판단의 근거도 알아보며 인간 탐구해 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나!
두 번째 이유는 나 스스로에 대한 탐구이다. 공자는 만상이 불여심상이라 했고, 관상학에서도 늘 유형의 상은 무형의 마음에 의해 지배되어 변화한다고 한다.
나의 마음을 알기는 나 자신이라도 어려운 반면, 나의 얼굴을 알기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 관상에 내 상을 비추어 보는 것은 내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기회가 된다.
스스로 단점을 파악하여 작은 허물이라도 고치는 것은 덕의 근본이 되고, 부귀빈천을 정하는 요소가 상에 의할지라도 그 상을 형성하는 것은 마음이라 했다. 나 자신을 알아 가기 위해서 하는 몇 가지 일이 있는데(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것/싫어하는 것 리스트 써 보기 등) 그 가운데 하나가 이런 이유에서 내 관상 보기이다.
여담을 하자면, 부귀빈천을 정하는 요소가 상이라는 부분을 읽고 처음에는 약간 발끈하는 마음도 들었으나 현시의 소위 금수저 흙수저론을 떠올리고 보니 영 아닌 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했다.
굳이 하나의 이유를 더 들자면, 재미지 뭐. vonvon이니 뭐니 하는 심리테스트 서비스가 페이스북에서 무수히 공유되는 걸 보면 다들 믿지는 않아도 재미는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