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모아
열린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에리히 케스트너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말해서 사랑으로서의 사랑이 되돌아오는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최승자의 시집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감정의 백과사전이었다.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봄>)라는 시구로 매년 봄을 맞았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라는 시구를 다이어리 첫 장에 써 놓고 이십 대 발빝의 불안을 견뎠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지적인 글은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좋은 문장은 '제스처의 왕성함'보다 '감정의 절실함'에서 나온다는 것.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 김현의 고백은 부끄럽고 초라해도 자기 색깔을 만들어 가도록 등 두드려 주었다.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라는 니체의 말에 속내를 들킨 듯 움찔했다.
착한 딸,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의 도덕에 결박당해 시들어간 청춘, 스스로 부과한 도덕적 책무를 이고 지고 사느라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낙타같은 날들이 스쳤다.
가치 전복의 말, 시대의 도덕이 아닌 네 본성에 충실하라는 생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해방의 말, 폭포처럼 떨어지는 아포리즘은, 그대로 시였다.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이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
휘청거릴지언정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니체의 말)
글쓰기는 나만의 속도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안전한 수단이고, 욕하거나 탓하지 않고 한 사람을 이해하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내 식대로 수영을 글쓰기로 번역해본다. 수영장가기(책상에 앉기)가 우선이다. 그 다음엔 입수하기(첫 문장 쓰기). 락스 섞인 물을 1.5리터쯤 먹을 각오하기(엉망인 글 토해내기). 물에 빠졌을 때 구해 줄 수영하는 친구 옆에 두기(글 같이 읽고 다듬기) 다음 날도 반복하기.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소멸될게 분명했다." 생존의 글쓰기. 글이 나를 쥐었다.
글쓰기는 내가 지은 긴급 대피소. 그곳에 잠시 몸을 들이고 힘을 모으고 일어난다. 이십 대의 젊음은 회복이 빠를 것이라 믿으니 나는 그들에게 주저 없이 말한다. 어서 쓰고 어서 나가라고, 저 햇살 속으로.
"간절하게 원하면 지금 움직이세요. 노희경입니다."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는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 헨리 밀러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쓸 수도 없고 안 쓸수도 없는 딜레마에 놓인 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한다.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글을 배우면서 내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고 인간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다." 이곳 수업에서 난 '평생'학습의 본디 뜻을 배웠다. 어던 이들을 평생 배우고 쓴다지만 특정한 서사를 주어진 틀 안에서 되풀이하고, 어떤 이들은 뒤늦게 배우고 쓰면서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된다.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 - 이성복
슬픈 책을 읽고 슬픈 일을 꺼내 슬픈 글로 쓰면 슬픈 채로 산다. 살아갈 수 있다. 왜 슬픈 책을 읽느냐는 항의는, 나는 슬프다는 인정이고, 슬픈 사람은 할 말이 많게 마련이며, 거기서부터 글쓰기는 시작된다.
무의미의 반복에서 의미를 길어 내기. 무모의 시간을 버티며 일상의 근력 기르기.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다. - 수전 손택
"배우는 하얀 도화지여야 하는데 나는 이제 신문지처럼 글자가 많은 종이가 된 것 같아요." 연극 무대의 독백처럼 쓸쓸하게 들리던 그 말이 훅 들어왔다. 도화지가 아닌 신문지. 그건 내 얘기였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 처지가 되어 보는 것, 그것이 작가의 일이다. - 아모스 오즈
상대방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 김대중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 김영하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 주는 누설자다. - 프리드리히 니체
행은 시의 단위이고 단락은 산문의 단위라고 한다. 나는 글을 쓴다는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본다. 단락에 생각 붓기.
"작가로서 자의식을 가지세요. 나는 왜 무엇을 쓰고 싶은가,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사람들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 물음을 어루만지는 동안 아마 계속 쓰게 될 거예요."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다. - 레베카 솔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