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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슴 Jan 21. 2019

내가 바라는 관계는요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발견한 관계에 대하여

의학사를 보면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례가 나온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찢어질까봐” 아니면 “노른자가 흘러나올까봐”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사는 그의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진정제 등 온갖 약을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어떤 의사가 미망에 사로잡힌 환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늘 토스트를 한 조각 가지고 다니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앉고 싶은 의자 위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앉을 수가 있고, 노른자가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환자는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녔으며,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힘들었지만 다 읽어 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들을 시도해봤지만 읽기가 힘들어서 포기했는데 이건 재밌었어요. 뒤로 갈수록 더 그러더라구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거, 연애소설이에요. 남녀 한 쌍이 나오구요. 남자 주인공 1인칭 시점에서 진행돼요. 그런데 주인공이 관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철학적인 사유를 해요. 그래서 좀 어렵긴 합니다.


위 인용 부분은 제가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에요. 좀 극단적이긴 하죠. 제 연인이 스스로를 달걀 프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약간 당황할 것 같기도 해요. 그나마 달걀 프라이면 토스트 얘기라도 하겠죠, 자기가 토스트라고 하면 또 뭐라고 해야 할까요? 상상만으로 난감해집니다. 하지만 포인트는 그게 아니겠지요. 저는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상대의 감정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에서 중요하다.


상대방의 말을 무조건 맞다고 해야 된다는 말이냐고요?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일단 구분부터 해봅시다. 상대의 말을 둘로 나눠봅시다. 감정과 사실 관계요. 사실 관계는 맞고 틀리다는 판단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감정은 옳기만 한 겁니다.


김제동 씨는 한 방송에서 자신의 썰을 풀었습니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은 이렇습니다.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분리수거를 했는데 동네에 이상한 아주머니가 자기한테 괜히 잔소리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연예인이고 하니까 그 앞에서는 뭐라 말을 못 했습니다. 그게 답답했던 겁니다. 코디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몇 마디 안 했습니다. ‘한 아줌마가 분리수거 때문에 자기한테 뭐라 했는데 말을 못 해서 화가 난다.’는 식의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실 관계를 다 말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코디는 ‘우리 오빠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버럭버럭, 김제동 씨 본인보다 더 많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김제동 씨는 갑자기 화가 풀리고 안도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JTBC <김제동의 톡투유> 중 갈무리



왜 그랬을까요? 저는 코디가 조건 없이 상대의 감정을 온전히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 채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제동 씨는 자신이 받아들여졌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코디가 사실 관계를 물었거나 따졌다는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아요. ‘사실은 오빠가 분리수거를 잘못한 거 아니야?’, ‘오늘이 분리수거하는 요일이 아닐지도 몰라.’ 같은 질문이요.


다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제가 인용한 부분을 보시죠. 마찬가지로 의사가 제시한 해결책 또한, 환자가 느끼는 것이 옳다는 가정하에 나온 것입니다. '네가 예민한 거야.', '피해의식 있는 거 아냐?'와 같은 말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라고 쉽사리 단정짓는 말들, 너무나 많잖아요. 김제동 씨의 코디와 이 의사가 한 행동이 너무도 흡사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관계는 나중에 따져도 됩니다. 상대방의 감정이 아직 격한 상황이라면 그건 아직 그 감정이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그럴 때 같은 편에 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관계에 큰 차이를 불러일으킬 거라 예상합니다.


저는 제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제가 좋아하는 사람,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를 특히 더 보이고 싶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는 원래 코디 분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태도가 무척 익숙해지도록 계속 연습하려고요. 제가 상대에게 받고 싶은 태도를, 최소한 저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표지



만약,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챕터를 추가할 기회가 저에게 주어진다면 이 내용이 될 거예요. 살다 보면 또 어떻게 우선순위를 배열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래요. 이게 뒤로 밀려날지도 모르죠. 누군가는 그러더라구요. 이거, 그냥 나이 들면 다 이해하는 거라고. 그런데 저는 좀 일찍 가져보고 싶어요. 시작점이 이 정도라면 끝의 우리는 더 더 나은 관계 속에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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